[독자기고] 남이(南怡)의 여진 정벌, 선택의 폭과 기회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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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남이(南怡)의 여진 정벌, 선택의 폭과 기회의 문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명예교수

  • 승인 2025-10-15 08:57
  • 수정 2025-10-15 11:24
  • 현옥란 기자현옥란 기자
이도형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명예교수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사전적 의미는 '거의 망하게 된 것을 구원하여 도와준 은혜'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 후기 이래로 곧잘 사용한 개념이었다. 명(明)이 멸망한 이후에도 그 은혜에 깊이 감읍했기에 마지막 황제 연호 '숭정' 표기가 일상화됐다. 굴복해 수모를 겪은 청에 대한 일종의 정신 승리이자 자기 최면이요, 면목없는 백성들에 대한 가스라이팅이었다.

압록강변 의주까지 몽진한 절박한 상황의 선조는 명에 일종의 SOS를 쳤다. 이에 부응한 명군이 합류했기에 임진왜란의 판세가 바뀐 것은 사실이었다. 명군의 참전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크나큰 위안과 사기를 높여 주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명에 큰 빚을 진 심리가 지배하였다. 그렇지만 주둔지 명군의 폐해가 적지 않았고, 전선도 고착되는 등 전쟁 양상도 지지부진했다.

이와는 달리 명이 조선에 청병한 경우도 있었다. 명 조정은 훗날 청을 건국한 건주위 여진 정벌 건으로 조선에 청병했다. 조선군과 명군의 연합작전이었다. 1467년(세조 13) 조선 조정은 파병을 결행했다. 강순을 대장으로 한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을 지나 파저강인 지금의 혼강을 건너 건주위 여진 소굴을 급습했다. 이 싸움에서 조선군은 추장 이만주 부자를 참살하고 부락을 빻아버리는 압승을 거두웠다. 이들은 명군이 당도하기 전에 나무 껍질을 벗겨 내고 흰 바탕 위에 '모년 월일에 조선 대장 강순·어유소·남이 등이 건주를 멸했다'고 썼다. 그리고 붙잡혀 왔던 중국인 백성들도 석방했다. 조선군 단독으로 정벌을 일찌감치 마무리하고 회군한 것이다.

이듬해 봄, 명 헌종은 전공을 세운 남이 등 조선군 장군들에게 진보(珍寶)를 보내 크게 포상했다. 명의 우환을 조선이 깔끔하게 해결해 주어서였다. 이때 조선에 온 명 사신은 즉석에서 요청한 남이의 활솜씨를 보고 감탄하며 "이와 같이 뛰어난 장수는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데, 이 같은 사람이 좌우에서 시중들고 있으니 전하는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 저들(여진족)에게 쏘았던 궁시(弓矢)를 원컨대 황제의 도성으로 가지고 돌아가 무리들에게 과시하며, '이것은 우리 조선이 건주(建州)를 정벌할 때 비장(裨將) 남이의 활이다'고 말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488년 남중국에 표착한 최부(崔溥)에게 중국인들이 "당신네 나라는 어떤 장기(長技)가 있어서 수·당의 군대를 격퇴할 수 있었는가"라고 물었다.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의 장수 유원외(劉員外)도 선조 앞에서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으로 불리었는데"라고 평가했다. 남이 등 조선 원정군의 압승은 국가적 위상을 드높였고 고구려 이래의 강국 이미지를 보전해 주었다.

비록 명의 요청에 부응한 원정군이었지만, 조선은 단독 작전으로 압승을 거두었고, 이후에도 건주위 여진 정벌에 윤필상 등이 대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건주위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조선을 구원하겠다고 장담했다. 명이 출병하지 않았더라도 여진 군대가 조선을 지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조선 조정은 누르하치의 제의를 거절했지만, 내부의 반대가 많았던 명의 파병이 없었다면, 어제의 적(敵)인 여진 군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을 법하다.

이렇듯 돌고 도는 게 국제 관계이다. 우리가 중국을 지원했던 사실을 상기하면서, 선택의 폭을 확장한 유연한 사고는 기회의 문도 넓혀줄 것이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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