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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통일민주당 각목 사건의 용팔이 김용남/사진=ebs캡쳐 |
지난 정치사를 보면 민중의 허락을 받지 않은 권력과 그 힘에 기생하려던 조직폭력배의 커넥션은 부패한 정권 탄생을 만들었다. 1990년대 ‘범죄와의 전쟁’ 이후에는 대부분 자취를 감춘 일명 ‘정치깡패’는 50·60년대 정가를 화려하게 장식했었으며, 70년대와 80년대를 휘젓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은 1952년 부산 피란 시절 독재정권 기반을 굳히기 위해 발의된 발췌개헌안 처리를 위해서 조직폭력배를 동원했다. ‘반독재 호헌구국선언대회’에 난입한 폭도들이 기물을 부수고 폭력을 행사해 순식간에 대회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하기도 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땃벌떼, 백골단 등 폭력단체를 동원해 개헌에 반대하는 야당을 핍박했다.
이승만은 이후로도 폭력의 달콤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김두한, 이정재, 임화수와 같은 주먹세계와의 인연을 이어갔으며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한 반공청년단을 만들어 부정선거에 동원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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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통일민주당 각목 사건/사진=ebs캡쳐 |
5.16군사쿠데타 이후 한 차례 정치깡패 소탕이 있었지만, 악의 뿌리는 쉽게 뽑히지 않았다. 1976년 ‘신민당 각목 난동 사건’은 서방파 두목인 김태촌이 야당인 신민당 비주류의 사주를 받고 전당대회가 열리고 있던 서울시민회관에 난입해 주류파를 대회장에서 쫓아내는 어이없는 일도 있었다.
88올림픽을 앞둔 1987년에는 ‘용팔이 사건’이 정가를 시끄럽게 달궜다. 용팔이 사건은 조직폭력배 두목 김용남의 별명인 ‘용팔이’에서 유래했다.
민주와의 열기가 뜨겁던 당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여론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때 야당으로 있던 신한민주당의 이민우 총재와 이철승 의원 등이 여당의 ‘내각제 개헌’을 지지한다고 하자, 이에 반발한 김영삼과 김대중 등 뜻을 같이하는 의원들이 탈당해 통일민주당 창당을 추진하려 했다. 이에 김용남이 이끄는 폭력배들이 통일민주당 당사에 난입해 창당을 방해했다. 사건 직후 통일민주당은 정부의 정치공작으로 규정해 엄정한 수사를 촉구했으나, 내막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 했다.
사건 발생 그 이듬해인 1988년 올림픽의 열기가 가을 하늘을 뜨겁게 달구던 9월 24일 ‘오늘’ ‘용팔이’ 김용남이 검거됐고, 검찰은 신민당 이택희와 이택돈 의원이 지시했다는 짤막한 결론만을 내린 채 사건을 종결시켰다.
이 일은 결국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 돼서야 배후가 누구였는지 밝혀졌는데, 당시 강력한 야당 출현을 막기 위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안기부장 장세동이 지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싸움만 알던 내게, 한 국회의원이 찾아와 ‘김 동지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네’라고 했다. 변명 같지만, 그때는 애국심이었다.”
김용남은 자신의 행동에 반성하는 말을 남겼고 이후 기독교에 기의해 새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주먹의 맛에 빠졌던 권력의 종말은 그리 좋지 않았다. 권력을 쥐려는 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시그널일 것이다.
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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