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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루트]백제왕 추모하는 일본의 '시와즈 축제'

미야자키의 백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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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11-11 00:00 | 신문게재 2008-11-12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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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규슈(九州) 남단 <미야자키>현 오지엔 남향촌이 있는데 이것을 일명 백제마을(百濟の里)이라 부른다. A. D.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왕손이 건너가 묻혀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의 왕도였던 부여와는 자매를 맺고 왕성하게 교류가 이뤄지고 있는 고장이기도 하다. 그곳은 유서 깊은 고장이라 해서 일본 왕실이 관장하는 보물창고가 있는 곳이다.

때문에 나라(奈良)에는 세이소인(正倉院)이 있고 이곳 백제마을엔 <니시세이소인(西の正倉院)>이 들어서 있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몫을 하는 곳이다.

◆ 백제왕 모신 두 신사

이 마을에는 <미카도> 신사(神社)와 부여 <고란사>의 종을 닮은 <범종>이 울려 퍼지고 <영빈관(百濟の館)>과 부여의 <백화정>을 모방한 누각이 있어 백제왕도의 축소판이라는 인상을 물씬 풍기는 곳이다. 그럼 이 소읍을 백제마을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거기에는 천수백년 간 전해오는 유물과 전설이 어우러져 이 마을 입구에는 일인들이 <백제마을입구>라는 간판을 세워놓고 있다. 맨 먼저 그곳을 답사한 것은 1970년대 민속학자 <임동권> 박사와 <이석호> 부여문화원장, 부여 유지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개발 당시에는 한 ? 일 의원연맹 한국 측 간사 이인구(李隣求) 의원이 앞장서 난제들을 푸는데 힘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 의원은 해결사였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그는 계룡장학회를 설립, 그 안에 해외문화탐사 팀을 구성, 역사 ? 문화 ? 예술 활동을 선도했다. 그 바람에 필자도 십 수차례 <백제문화연구> 팀에 참가, <남고송> 탐사에 참여한 일도 있다. 그러니 백제마을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 후미진 산골에는 옛 부터 백제왕족의 이야기가 대를 이으며 전해지고 있었다. 백제가 망하자 동맹국인 일본으로 왕족은 물론 유민들이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기내(나라, 오사카, 교토)지방으로 들어갔다가 일본의 전란을 피해 큐슈(九州)지방으로 피난했으나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다.

두 척의 배에 나눠 타고 큐슈(九州)지방으로 향했으나 <세도나이카이>에서 폭풍을 만나 <정가왕>은 휴가(向日)의 <가네가(金ケ濱)>에 표착을 했고 장남 <복지왕>은 어머니와 함께 <가구치(蚊口)>해변에 상륙할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아버지 <정가왕>은 <남향촌>에 아들 <복지왕>은 90㎞나 떨어진 <기조죠히기(木城町比木)>에 표착을 했다.

하지만 <정가왕(父)>의 급보를 받고 아들은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추격, 격퇴시켰지만 이 전투에서 <정가왕>은 전사, <즈카노하라(塚の原)>에 묻혔다. 그리고 막내 <황자왕>도 이곳에 묻혔다. 이렇게 해서 <정가왕>은 <미카도(神門)> 신사에, 복지왕은 훗날 <히노기(比木)> 신사에 묻혔다. 이와 같은 애사(哀史)를 간직하고 있는 게 <백제마을>이다.


◆ 백제왕 10대 전설

이상과 같은 애사(哀史)와 전설을 현지주민들은 믿고 추모하는데 대해 우리로선 여기에 사족(蛇足)을 달 생각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보다 과학적인 수법으로 역사정리를 해야 할 시점에 섰다는 걸 실감한다. 예를 들면 <정가왕>, <복지왕>의 혈통과 배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과 왕자 <융(隆)>은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중국 낙양으로 잡혀갔고 차남만은 일본에 살고 있었다는 설이 나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일각에선 차남이 <화지왕>이라 말하는 이가 있지만 현지에선 <정가왕>의 막내아들이라는 설도 나돈다. 상식으로 따진다면 백제는 의자왕으로 종식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의자왕 차남이 일본에 생존해 있었다하더라도 그것은 법통으로 왕이라 보기는 어렵다. 왕위를 이어 받았거나 <망명정부>를 세웠다면 몰라도…. 옛날 절대왕권 하에선 많은 궁녀와 왕비를 거느렸기 때문에 당대 왕자는 한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망명정부 성격의 왕이 정가, 인지 또 그 아들이 <복지왕>이라면 위계(계승)의 성격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왕을 자처했는지 이 또한 모호해진다. 어떻든 <정가왕>은 <미카도(神門)> 신사에, 아들 <복지왕>은 <히키(比門)> 신사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어머니는 <고마루가와(小丸川 )>에 묻혀 있다. 그렇게 백제왕족은 10대(代)를 이곳에 묻혔다고 현지인들은 굳게 믿고 있다.

◆ 왕을 추모하는 <시와즈 축제>

백제 <정가, 복지> 추모제를 그곳에선 <시와즈(師走)> 추모제라 해서 잔치를 벌여왔는데 백제마을에선 또 이것을 연중 가장 큰 민속행사로 삼고 있다. 이 제례는 1947년까지 10일간에 걸쳐 여는데 온 마을이 들뜰 정도로 큰 규모 축제였는데 요즘에는 2박3일 동안 치러진다. 이 추모행사는 밤이 으쓱하도록 <가꾸라(神樂)>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남향촌>과 <히키(比木)>주민 남녀노소 모두가 참가, 불꽃놀이, 전통가무를 연출하며 백제왕을 추모하며 즐긴다. 그리고 양측이 헤어질 때는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オ.サラバ(안녕! 잘 가시오!)>를 연발한다. 내년 재회(再會)를 기약하며 눈물까지 흘린다. <오.사라바>란 요즘 말로는 Good Bye라거나 See You Again, 아듀(Adieu)일 수 있다.

◆ 계룡장학회 학술탐사팀의 활동

이인구(李麟求) 계룡장학회 이사장은 오랜 세월 장학사업을 펼쳐오다 지난 93년 재단내에 해외학술연구팀을 조성, 가동하고 있다. 임원진은 국립대총장출신 중견 법조인, 언론계 중진 각계 인사로 구성 운영해왔다. 중국, 일본 등지의 백제문화유적을 답사, 역사정리는 물론 문화유적의 발굴, 재조명을 해왔다.

<귀국보고>와 <세미나>개최는 물론 책자를 발간하는 등 사업규모를 넓혀가고 있다. 고구려의 옛 땅 집안(集安)을 답사 <광개토대왕대비>를 원형대로 각인 그것을 천안독립기념관에 건립한 바 있다. 그리고 중국 <낙양>으로 끌려간 백제왕이 묻혔다는 <북망산>을 찾아가 위령비(碑)를 세우려다 중국당국의 제어로 불발에 그친 일도 있다.

또 여순 땅에 묻힌 안중근 의사의 유해 송환을 계획한 일도 있었다. 이를 위해 일본의 국회의원까지 동원했으나 당시 중국의 비협조로 아직은 숙제로 남아 있다. 그 뿐만 아니다. 상해의 임시정부청사 모형을 떠 <독립기념관>에 세우려 한 계획한 일도 있었다. 또 한 가지 소개하려는 것은 장학회 해외탐방팀의 활동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인구 이사장의 진두지휘 아래 해외탐사팀은 일본 큐슈(九州)에 산재한 백제유적을 두루 밟았으며 어느 곳은 3~4회를 탐사했다. 그 발자취는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 유적탐사코스

▲ 큐슈(九州)내의 백제산성 = 다사이후(太宰府)의 평지성과 나고야(名護屋)성, 구마모토성, 그리고 기쿠치(菊智城)을 탐사한 바 있고 ▲ 요시노가리(吉野ケ里) 농경취락유적지 = 백제가 전수한 농업지역으로 거기에는 고상(高床)창고, 집단농경유적과 미탄(米炭)이 나오는 걸 보았다.

▲ 미야자키 <사이도바루(古墳群) = 이곳의 고분은 고구려의 장군총, 신라의 왕릉을 능가하는 규모의 고분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것은 A. D. 2~7년까지 일본지배세력의 무덤이라는 게 <죠몽>시대의 주거지와 ▲ 미야자키(宮崎)의 백제마을 = 일명 낭고송(南鄕村)이라 불러온 이곳은 백제의 <정가왕>과 <복지왕>부자가 추격군에 의해 살해된 슬픔을 간직한 고장이기도 하다.

두 부자의 한이 서린 이 마을에선 해마다 <시와즈(師走祭)>추모제가 열리고 있는데 특히 백제의 옛 서울 부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마을이다. ▲ 혼묘지(本妙寺)와 여대남(余大男) = 구마모토시 변두리에 있는 혼묘지에는 임진란에서 악명을 떨친 <가토기요마사>를 안장한 구마모토 제일의 사찰이다. 이곳엔 <여대남>부자의 이산(離散)의 한이 서린 사찰이다.

여대남은 임진왜란 때 <가토기요마사>의 침략을 받았을 때 소년의 몸으로 붙들려가 <가토>의 명에 따라 불교에 귀의 이 절의 주지로 평생을 보냈다. 아버지 여천갑(余天甲)과 인편으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여대남은 부친에게 다이묘(大名)들이 좋아하는 <매> 두 마리만 보내주면 그것을 상납, 귀환을 청하겠다고 했으나 부친은 이를 거절했다.

<매>의 거래는 국법으로 막고 있으니 방법이 없다고 적어 보냈다. 그 편지의 탁본은 이인구 이사장과 필자가 각각 한통씩 소장하고 있다. <망향의 한>과 이산의 아픔은 끝내 치유를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이것을 경남 <하동> 여씨문중과 연결, 현지에서 제례를 올린 바 있다. ▲ 일본 도자기와 이참평 = 일본에 도자기 제조기술을 전한 것은 조선도공들이다.

임진란 이전엔 일본엔 이렇다 할 도자기가 없었다. 그래서 임진란 때 왜병들은 조선도공 수백명을 납치해갔다.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자기하면 <아리타(有田)와 <사츠마(薩摩)>의 두 산맥이 있는데 그 시조는 공주 학봉리에서 잡혀간 이참평과 남원성이 함락할 때 포로가 된 <심당길>이 각기 일본의 도조(陶祖) 또는 도신(陶神)으로 받들고 있다.

◆ 역사는 부활하는가

오늘날 한.일간엔 역사왜곡문제로 줄곧 갈등을 빚고 있다. 일제 때 교과서에선 반만년 한민족사(史)를 그들 2600년사에 예속시킨 일도 있었다. 지금도 <역사왜곡교과서>를 놓고 충돌을 반복하고 있다. 전술에서 상대(敵)를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논리가 서슬을 세운다. 아직도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우며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식으로 나온다.

어디 그 뿐인가. <광개토대왕비>에 부식한 문자를 교묘하게 손질해놓고 그들의 <황국사관>을 미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현해탄의 물살을 늘 파고(波高)를 드높여왔다. 그럼 우리의 대응책은 무엇이며 극일(克日)전략은 어떤 것인가. 나를 알고 일본의 역사와 그들의 근성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당위가 여기에 있다.

한마디로 차근차근 뿌리부터 다져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쪽바리 놈들!>, <배은망독하는 무리>하며 집회를 열고 <타도!>를 외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좁혀 말한다면 이렇다. 충남도와 <구마모토>현이 자매를 맺고 교류한 바, 그 결과는 이러했다. 역사왜곡교과서를 <구마모토>에선 거부했다는 건 무엇을 때문인가?

<미야지키>의 백제마을에서 지난 93년 대전 EXPO 때 <정가왕>, <복지왕>의 혼백을 모시고 건너와 공주, 부여의 선왕(선조)께 문후를 올린 일이 있다. 이를 유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건 이인구 이사장이었다. 이것이 외교요, 역사 찾기의 수순이라 할 수 있다.

백제마을 개발 때 이 의원은 그곳 백제 장승 한 쌍을 대전에서 운송, 그곳에 세웠다. 당시 이 의원 측근 조중원 감사, 윤건원 비서실장이 장승건립을 위해 일주일간 머물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화제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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