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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 전문의인 노승무 교수 |
어린 시절 살던 마을에는 뽕나무가 흔했다. 양잠(養蠶, 누에치기)을 장려하던 시기라서 공터나 밭 둘레에는 뽕나무를 심고, 집집마다 누에를 쳤다. 누에 먹이인 뽕나무 잎은 굳이 뽕잎이라 하지 않고 그냥 뽕이라 불렀다. 나는 뽕을 따는 데는 별 관심이 없고, 뽕나무 열매인 오디 먹는 것에 더 열심이었던 기억이 난다. 크기도 작고 맛도 별로지만, 군것질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이라 그 흑자색 열매를 손가락과 입술이랑 혀가 까맣게 물들 때까지 먹었다.
초등학교에서도 학생들은 누에를 키우면서 곤충의 변태(變態)과정을 배웠다. 제법 단단한 누에고치를 뚫고 나온 암·수나방이 짝짓기를 하고, 종이 위에 알을 오디모양으로 낳는다. 알에서 깬 개미누에는 뽕을 갉아먹으면서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란다. 네 잠과 더불어 네 번 허물을 벗은, 어른 새끼손가락만한 크기의 통통한 누에를 섶에 올리면 입에서 비단실을 뿜어내 고치가 되는 과정은 신비 그 자체였다. 수십 년이 지났어도 눈에 선하다.
카프카(Franz Kafka)의 '변신'에서 주인공인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했을 때, 나는 커다란 누에를 떠올렸다. 사람이 어느 날 벌레로 변했다는 설정도 난해하고, 왜 이런 소설이 20세기 실존주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지, 동시대인(작품이 발표된 1915년 즈음)의 불안한 내면세계와 소외의식을 잘 표현했다는 해설을 읽고서도 좀처럼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오늘 오디를 주우면서 다시 떠올린다. '일상적인 세계로부터 소외되고, 가족과 사회도 따뜻한 공동체가 아니다'라는 작품 평을.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는 얼마나 불안하고 외롭고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가를…. 위대한 작가는 시대에 앞서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다.
괜히 오디를 따러가자는 꾐에 넘어가, 고요한 마음에 돌을 던진 셈이 되어버렸다.
(충남대 명예교수·전 충남대 의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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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보다 높은 뽕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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