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시평] 오랜 듯 오래지 않은 약속

  • 오피니언
  • 중도시평

[중도시평] 오랜 듯 오래지 않은 약속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승인 2018-01-09 09:16
  • 수정 2018-01-10 09:10
  •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 교수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노란 손수건 이야기의 빙고처럼 여러 날 마음이 들떴다. 새해 들어 더욱 그랬다.

캔버스에 물감이 번지듯 어떤 약속 하나가 일상의 말과 글과 행동을 하나씩 들춰내 돌아보게 만들었다. 약속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오래된 약속이었다. 정해진 날, 정한 시간에 대학 정문 앞에 서 있기로 한 약속이었다.

새벽부터 흰 눈이 가득 내렸다. 차량이 자기 속도를 내지 못하고 기어갔다. 시간에 쫓기던 성급한 차들끼리 부딪혀 다른 사람의 시간까지 지체시키는 일들이 시내 곳곳에서 벌어졌다.

사람이 오고가기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 기온도 뚝 떨어졌다.

전날 밤, 형제인 듯 지내 온 멀리 사는 동생의 어머니가 작고했다. 한달음에 가서 빈소를 지켜야 할 일이었다. 양해를 구하고 하루를 대전에 더 머물렀다.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십년 전 이맘 때 수업을 들었던 여남은 학생들과 저녁을 먹었다. 전공학생이 반, 복수전공을 하는 다른 학과 학생이 고루 섞였다.

영화를 제작하겠다, 사진을 찍겠다, 소설을 쓰겠다, 유학을 가겠다, 광고를 하겠다, 카피라이터가 되겠다, 기자가 되겠다, 방송작가가 되겠다는 이야기들을 나눴다.

구체적으로 뭐가 되겠다는 말 대신 열심히 살겠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다가 누군가 "우리 열심히 살다가 십 년 후 날을 잡아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약속을 걸었다. 2018년 1월 8일 18시 교문 앞으로 정했다.

그 사이 우리는 두 번의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고 국회의원 선거를 세 번 치렀다. 금융위기가 시장을 쓸었다. 영화와 사진과 광고와 방송과 신문이 경영상 이유로 새로 사람을 들이지 않으려 한 숨 막히는 시기였다.

청년들은 살아남았을까,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살아 왔을까, 일터에 발을 들여놓기나 했을까, 저녁 여섯 시에 교문에 올 수 있을까, 가슴이 먹먹해졌다.

약속한 날이 가까워오자 그런 걱정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마음을 흔들었다.

술 한 잔 곁들인 저녁 식사자리에서 만들어진 작은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 말하고 삼키기, 쓰고 지우기, 만들고 삭제하기가 번개보다 더 빠른 디지털 세상에서 오래된 참나무 가지마냥 늘어지고 울퉁불퉁한 약속은 버려도 무방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선생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언제 맺었건, 어디서 손가락을 걸었건 학생들과 맺은 약속의 무게와 크기가 다를 수 없었다. 어둡고 바람 찬 교문 벽에 혼자 기대어 민망하고 초조한 시간과 씨름하더라도 약속한 시간에 거기 서 있어야 했다.

약속은 절대였다. 여섯 시, 교문 수위실 앞에 섰다. 맞은편에서 청년들이 뛰어 왔다. 더러는 기차를 타고 멀리서 오는 중이라고 했다. 더러는 이메일과 SNS에다가 십 년 약속을 회상하면서 열심히 사는 중이라고 적었다.

내면이 강하고 성정이 고왔던 어떤 청년은 팍팍한 삶의 징검다리 건너기가 버거운 듯 했다. 학창시절부터 꿈꾸던 길을 한결같이 살아온 터였다. 그리운 전화가 연결되었으나 그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들 것 같아 통화를 다음으로 미뤘다.

삼십대 초중반을 건너고 있는 청년들은 또 선생에게 스승이 돼 주었다. 선생에게 학생들의 말은 가볍지 않다.

학생에게 선생의 말이 가벼워서는 안 된다. 십 년 전 선생의 말 하나를 어제처럼 가슴에 담고 있지 아니한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학생들에게 안겨 준 무심한 말의 상처는 그 얼마나 깊을 것인가.

옳은 것을 바르게 전하는 말만 하여도 부족할 것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힘껏 격려하는 말들을 퍼부어주어도 부족할 것을, 공부가 게을러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그릇 인도하고 있지 않은지 두려워졌다.

가벼웠을 선생의 말을 약속으로 여겨서 선생이 기억하지 못하는 몹시 덥거나 아주 추운 날 어딘가에서 오래 기다리다가 실망스럽게 발길을 돌려야 했던 제자들은 혹시 없었을까? 오랜 듯 오래지 않은 단순한 진리를 되뇐다. 아이는 부모에게, 학생은 선생에게 가장 훌륭한 스승이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태안군, 가을 꽃게잡이 본격 시작
  2. [사진기사]태안 청산수목원·천리포수목원, 가을의 전령사 팜파스 그래스 개화
  3. 대전 서구, 골목형상점가 13곳 신규 지정…총 36곳으로 확대
  4. 대전 트램 공사현장서 60대 작업자 3명 감전
  5. [날씨] 충청권 오전 비·오후 소나기…낮 최고 33도
  1. 대전국세청 "국민공감, 공정세정 펼친다"
  2. 갤러리아타임월드, ‘사랑의 빵 나누기’ 후원금 전달
  3. 사라지지 않는 불법 현수막
  4. 경찰 사칭해 오피스텔 침입·집단폭행… 수천만원 강탈 일당 6명 구속
  5. 한국영상대, 29일 '게임·애니·VFX 계열' 입시 상담회 개최

헤드라인 뉴스


"군 공항 추가 배치 결사 반대" 서산, 광주공항 분산배치 반발

"군 공항 추가 배치 결사 반대" 서산, 광주공항 분산배치 반발

충남 서산시 해미면 주민들이 광주 군 공항 전력의 서산 분산배치 검토 소식에 강하게 반발하며 본격적인 대응에 나섰다. 서산 해미면 소음피해지역 주민들은 20일 해미면 행정복지센터에서 가칭 '광주공항 분산배치 대책추진위원회' 회의를 열고 주민들의 반대 입장을 확인하는 한편 향후 대응방안을 논의했다. 이번 회의는 최근 정부가 광주 제1전투비행단 예하 3개 비행대대를 서산·충주·예천 등으로 분산배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내용이 알려진 데 따른 것이다. 특히 서산시 해미면 지역은 현재도 제20전투비행장 주변에 위치해 전투기 등 군용항..

경찰 사칭해 오피스텔 침입·집단폭행… 수천만원 강탈 일당 6명 구속
경찰 사칭해 오피스텔 침입·집단폭행… 수천만원 강탈 일당 6명 구속

경찰을 사칭해 오피스텔에 침입한 뒤 온라인 사행성 사이트 운영자를 집단 폭행하고 수천만 원 상당의 금품을 빼앗아 달아난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대전서부경찰서에 따르면 경찰은 강도상해 혐의로 A(30대)씨 등 6명을 구속 송치했다고 21일 밝혔다. A씨 등은 지난달 10일 오전 2시께 대전 서구 만년동의 한 오피스텔에 침입해 온라인 사행성 사이트 업자인 B(20대)씨를 폭행한 뒤 현금 3100만 원과 130만 원 상당의 컴퓨터 본체 2대 등 금품을 빼앗아 달아난 혐의를 받는다. 20~30대인 이들은 평소 A씨를 중심으로 '자금이 모..

대전 서구, 골목형상점가 13곳 신규 지정…총 36곳으로 확대
대전 서구, 골목형상점가 13곳 신규 지정…총 36곳으로 확대

대전 서구가 골목형상점가 13곳을 추가 지정해 온누리상품권 사용처를 확대했다. 서구는 20일 구청 보라매실에서 신규 골목형상점가 지정서 교부식을 열었다. 골목형상점가는 2000㎡ 이내 면적에 소상공인이 운영하는 점포 15개 이상이 밀집한 구역을 대상으로 상인 조직의 신청과 심의를 거쳐 지정된다. 지정 시 온누리상품권 가맹점 등록과 골목상권 활성화 지원사업 참여가 가능하다. 이번에 신규 지정된 골목형상점가는 크로바쇼핑센터, 둥지수정상가, 둔산3동근린상가, 도안골, 도안호수공원, 도안우미, 관저상가, 파워존, 도마사거리, 도마달, 복수..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가족과 함께 해서 즐거운 한여름 밤 독서하기 가족과 함께 해서 즐거운 한여름 밤 독서하기

  • 사라지지 않는 불법 현수막 사라지지 않는 불법 현수막

  • ‘소방차 길 터주기는 의무입니다’ ‘소방차 길 터주기는 의무입니다’

  • ‘더위야 가라’…도심 속 숲길 걸으며 休 ‘더위야 가라’…도심 속 숲길 걸으며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