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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검사를 할 때나 변호사를 하는 동안, 정교순은 늘 교도소 밖에서 감옥 안을 바라보는 입장이었다. 담장 안에서 절박하게 바라보는 창살 너머는 어떤 모습일까? 대전지방변호사회 회장을 할 때, 대전 교도소의 도움을 얻어 하룻밤 이틀 동안의 수감 체험을 했다. 동료 변호사도 참여했다. 입감 체험은 교도관조차 허락받기 어려운 일로 알려져 있다. 변호사회 프로그램 덕분에 교도소장과 과장 한 사람도 독거실 수감의 귀한 경험을 얻었다. 14년차 변호사 정교순이 수감자의 눈으로 물리적 감옥 밖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 평 남짓한 독거실에 갇힌 그 날,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음이 아리고 시렸다.
정교순 변호사를 법조의 길로 이끈 것은 부친이었다. 운동을 잘해서 축구에 푹 빠져 놀던, 어쩌면 연기 출신 프로축구 선수가 될 뻔했던 그는 부친 손에 이끌려 대전 선화초등학교에 전학했다. "축구 선수 대신 법조인이 되자". 오십년 전, 아들의 자질을 알아챈 부친의 선명한 길잡이였다. 한국 프로축구가 출범하던 1983년, 정교순은 제25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천재적인 창의성보다 농업적 근면성의 가치를 깨우쳐 준 부친은 그의 사시 합격 소식을 들은 뒤 영면에 들었다.
정교순은 대구지검 검사로 첫발을 디뎠다. 공주와 의정부지청을 거쳐 서울과 대전지검, 대전고검에서 근무했다. 서울지검 시절 교수채용 비리, 늙고 병든 소에게 물을 먹여 판매한 일당, 억대 주부도박단 등 굵직한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이름이 언론에 자주 회자되었다. 서울지검 공판부 경력을 가진 그는 형사 특수부 검사로 출중한 실력을 발휘했다. 2000년대 초반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이 꾸려졌을 때 대전의 변호사 정교순은 특별검사보로 추천을 받았다. 지역에서 일하는 변호사가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는 일은 드물었다. 서울의 전국 일간지가 한국을 이끌어가는 대표적인 변호사 중의 한 사람으로 그를 지목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정교순이 변호사가 된 지 스무 해가 되었다. 변호사 개업을 할 때, 그가 다짐한 원칙이 있었다. 사무장에게 떠넘기지 않는다, 필수적인 서류를 직접 작성한다, 교도소 수감자를 자주 찾아간다, 안 될 일을 가능하다고 거짓말 하지 않는다, 변호해야 할 이유가 있는 사건을 변호한다는 다섯 개다. 강산과 우주가 변한다는 시간 동안, 그는 변호사로서 스스로 설정한 원칙을 지켜왔다. 뿐더러 지역사회가 요구하는 일들을 기꺼이 맡았다. 철도박물관을 대전에 유치하자는 일, 지역의 선거구를 증설하자는 일, 대전사랑시민협의회 등과 같은 일이다. 자신의 시간을 깨알의 반쪽처럼 쪼개 써야 할, 열심히 일해도 표가 나지 않는 일들 투성이다.
일상에서 숱하게 나누며 베푸는 정교순 변호사의 힘은 끊임없이 읽고 질문하고 배우는 삶의 방식에서 솟아난다. 변호사회장에 취임할 때 그는 선생을 구해서 컴퓨터의 원리와 화법을 사사했다. 주류와 소수 문화의 원천과 맥락을 공들여 배운다. 그의 말대로 변호사는 지역사회를 이끄는 대표적인 지성인이다. '배워서 남 주자' 청년 변호사들이 나날이 증가하고 법조를 보는 시민의 인식 수준이 높아진 시대, 지역의 전국 변호사 정교순에게 배우는 귀한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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