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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시게미쓰 마모루(사진출처=미 육군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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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미쓰 마모루 의전용 칼 |
예산군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상하이 의거로 단상 위에서 중상을 입은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가 사용하던 의전용 칼을 최초 공개한다고 24일 밝혔다.
이 칼은 지난 2003년 4월 29일 시게미쓰 마모루의 손자 시게미쓰 쓰토무 선생이 예산군 윤봉길의사기념관(공립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게미쓰 마모루(1887-1957)는 일본 외교관 겸 정치가로 1930년 상하이 총영사를 역임하고 1932년 중국 공사로 있을 때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한쪽 다리를 잃었으며, 1945년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그 해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으로 미 해군 미주리 함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을 한 인물이다.
1946년 A급 전범으로 도쿄전범재판에서 금고 7년형을 받고 1950년 가석방 된 이후 일본 외상으로 활동하다가 1957년 사망했다.
이번에 공개된 시게미쓰 마모루의 의전용 칼은 윤봉길의사기념관(공립박물관)의 상설전시관에 전시돼 상하이 의거 당시 폭탄을 맞은 인물의 유품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윤 의사의 후손인 윤주 선생과 시게미쓰 마모루의 후손 시게미쓰 쓰토무가 지난 2003년 한국에서 비공식적으로 만났을 때 찍은 사진자료까지 함께 전시해 독립운동사에서 발견하는 한일관계의 미래를 알아보는 의미를 더할 전망이다.
윤봉길의사기념관 관계자는 "지난해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무라이의 안경' 편과 더불어 이번에 공개한 시게미쓰 마모루의 유품을 통해 독립운동사 관련 한일관계에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며 "윤 의사 및 관련인물들에 대한 연구를 앞으로도 심도 있게 넓혀가겠다"고 밝혔다.
이 의전용 칼은 윤봉길의사 순국 제88주년인 12월 19일부터 일반 관람객들에게 선보이게 될 예정이다.
한편 윤봉길 의사는 일제 강점기에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1932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과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제에게 피해를 입혔다. 이 의거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 의거와 함께 ‘한국 독립운동의 2대 쾌거’로 평가받고 있다.
윤봉길은 한일 강제 병합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08년에 태어났다. 그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부터 농촌에서 야학을 열어 청소년을 가르치고, 직접 쓴 《농민독본》을 농민들에게 읽도록 해서 독립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했다.
1930년에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만주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독립군이 되고자 했지만, 당시 만주의 독립군 부대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이에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갔고, 그곳에서 이봉창의 의거 소식을 들었다. 그는 곧바로 김구를 찾아가 자신도 의거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한인 애국단에 입단한 뒤 거사를 준비했다.
당시 일제는 중국과 벌인 전쟁인 ‘상해 사변’을 승리로 이끌면서 기세가 한층 높아진 상태였다. 이에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과 상해 사변 승리를 축하하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1932년 4월 29일 천장절이 되자, 윤봉길은 물통 모양의 저격용 폭탄 1개와 도시락 모양의 자결용 폭탄 1개를 지니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행사장 한복판에 물통 폭탄을 던졌다. 윤봉길이 던진 폭탄으로 인해 상하이의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와 거류민 단장 가와바다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많은 일본군 장교들과 중요 인물들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의거 직후 현장에서 붙잡혔다. 그는 일본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오사카로 옮겨진 뒤 같은 해 12월 19일에 총살당했다.
예산=신언기 기자 sek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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