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용 시인의 ‘일어서는 땅’-
꽃을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고, 서예를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 정의감이 투철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 문화와 예술에 조예가 깊은 교육전문가인 이선용 시인이 30년 동안 쓴 시를 모아 59년 생애 첫 시집 <일어서는 땅>을 발간했다. 이에 이선용 시인을 만나 첫 시집 발간에 대한 소회와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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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 말씀에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가 있지요. ‘시 삼백 편이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라는 의미인데요. 한참 시를 읽고 쓰던 대학 시절에, 이선용이라는 청년이 사는 자취방 한가운데 크게 써 붙였던 ‘감정절제’라는 글귀가 생각납니다. 어느 시인은 “시는 감정을 절제하는 작업”이라고 말했는데요. 오랜 기간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부끄럽고 보잘 것 없는 시지만 선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 꽃이 예쁘다’ 하는 마음으로 시를 대하고 그 꽃이 오래 가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들여다보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시를 읽고 쓰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용기를 내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 그 문학 하려는 의지의 끈은 참으로 길고 질깁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즐거운 감정의 싹을 틔우고 싶습니다. 저의 이번 시집은 한밭시인선의 146번째 시집입니다. 저의 시 세계가 넓다고 말씀해주시는데 이 시안에 저의 모든 생각이 다 녹아 들어가 있는 셈입니다. 새봄이 오는 길가에서 시집 서평으로 격려와 응원을 해주신 나태주 한국시인협회 회장님과 이은봉 대전문학관장님, 그리고 제 시집의 해설을 써주신 김우식 문학박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독자분들에게 제 시집이 제 마음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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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대학 다니던 80년대는 시의 전성기였습니다. 시문학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죠. 많은 문인들이 시를 통해 우리 사회를 고발하고, 시로 국민들을 위로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의 삶에 시가 주는 현장성과 함께 위로를 주는 시들이 많이 나올 때였습니다. 김수영 시인의 <풀>은 순수문학의 맨 끝, 실천문학의 맨 앞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인데요. 이 때 당시 자연스럽게 군사독재를 비판하는 시들이 나오게 됐죠. 저는 김지하, 신경림, 김준태, 정희성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시의 현장성을 깨닫게 됐습니다. 시 문학이 갖는 어떤 위로를 주는 힘은 참으로 값진 것입니다. 문학은 우리 삶의 변화의 출발이고 변화의 반성임을 깨닫게 합니다. 시대를 통찰하는 것이기도 하고, 미래를 엮어내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국민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게 바로 문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화예술이 갖는 사회적인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문화 융성 자체는 사회적인 발전 상황입니다. 문화예술은 그만큼 성숙 되고 발전해 있는 거죠. 우리는 시장경제 활성화 시대를 맞아 문화융성시대를 살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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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서예도 좋아해서 사무실 책상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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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법학을 전공한 이유는 경찰관이나 법조인이 되기 위해서였는데요. 꼭 법조인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병을 고치는 데 있어서 문학의 역할이 더 클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대학 때 실천문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방송통신대에 들어가 국문학을 전공하게 됐죠. 그 다음에는 경제학이 실물경제와 밀접하다는 생각에 다시 방송통신대 경제학과에 편입했습니다.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에 대해 깊이 깨닫게 됐죠. 경제적인 패러다임을 공부하다 보니 서강대 대학원에 들어가 공공경제학을 전공하고 경제학 석사가 되었네요. 서른 네 살 때까지 계속 공부를 한 셈입니다. 직장 생활하면서 주경야독했지요. 대학 때는 학생운동을 했습니다. 한남대 총학생회에서 기획부장을 했지요. 대학을 졸업한 후엔 도자기 안료 만드는 공장에 다니면서 독서실에서 공부했습니다. 현장에서 근로자들과 같이 일하다가 14대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들어가 10년을 그 정치인과 함께 했습니다. 그 정치인이 낙선한 후에는 정계를 떠나 에너지관리공단에 취직했는데 IMF 때 직격탄을 맞고 해고당했습니다. 그 뒤로 보험회사를 6개월간 다니다가 99년부터 만년동에서 서강대 SLP 영어학원 부원장으로 11년 동안 함께 운영했고, 그 이후 도룡동에서 캐나다 브랜드 어학원을 설립해 12년째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퀄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들의 사고력과 성장 발달에 도움을 주는 학원입니다. 저는 이 학원의 이사장으로서 아이들의 영어교육에 대해 누구보다 큰 확신을 갖고 있지요. 대한민국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글로벌 인재를 양성해야 되는데 글로벌 인재의 핵심은 영어교육에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밖에서 안을 살찌우는 대한민국이 되려면 공교육에서 다루지 못하는 부분인 영어가 갖는 비중이 크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언어습득 능력이 스폰지처럼 빠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문화적인 다양성을 키워주는데 있어서 영어교육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9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영어유치원 경험이 많은데 지금 대한민국이 세계 속의 문화강국이 된 것은 깊은 영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어를 언어로 쓴다는 것은 그 문화를 이해하고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는 무형의 자산입니다. 영어를 함으로 인해 그 나라 문화를 익숙하게 받아들이면서 문화적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고 세계의 좋은 기술을 한국으로 받아들이는데 최고의 요소가 될 수 있죠. 어린 시절의 영어교육은 문법이 아니라 언어입니다. 말을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들을 수 있으면 말할 수 있습니다. 말할 줄 모르면서 쓰는 것은 기계적인 암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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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85년 가을, 대학친구들과 내장산 등산을 갔다가 내려오는데 시골에서 단풍 놀이 오신 남루한 옷차림의 마을 어르신들에게 동네 이장이 종이컵에 막걸리 한잔 씩을 따라주고 새우깡 한 개 씩을 안주로 집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난 농민의 아들인데 저렇게 남루한 차림의 초로들이 종이컵 잔에 집어주는 새우깡 안주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때가 전두환 정권 시절인데 어려운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23세에 신민당 청년당원으로 입당했고 조치원의 박희부 정치인과 10년을 함께 하면서 정치에 대해 배우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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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6남매 중 막내인데 어머니가 마흔다섯에 늦둥이로 저를 낳으셨습니다. 아버님은 84년 제가 대학 1학년 때 69세를 일기로 작고하셨고요. 어머님은 지금 103세시고 요양병원에 계십니다. 저희 어머니는 저에게 늘 ‘어디 가서 입찬 소리 하지 말아라, 잘난척하지 말아라, 생색내지 말아라, 공치사하지 말아라, 내려다보고 살아야지 쳐다보고는 못산다, 네가 먹은 밥그릇은 자싯물통(설거지통)에 넣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 밥그릇은 항상 싱크대에 갖다 놓습니다. 2녀 1남의 아이들은 다 잘 자라줘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교사인 큰 딸은 책 읽는 것을 좋아해 1년에 150권 이상 책을 읽습니다. 한국전통문화학교에 다니는 둘째 딸은 손재주가 좋아 전통민속공예품을 만듭니다. 막내 아들은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죠.
저의 이번 시집에도 어머니에 대한 시가 여러 편 있는데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항상 제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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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난, 민중봉기의 주인공 전봉준의 사진을 보면서 늘 초심을 잃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삽니다. 용기 있는 눈이 되고 싶은 거죠. 제 마음속에는 항상 실사구시 정신을 갖고 있습니다. 전봉준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 높은 설계를 꿈꿉니다. 애민정신이 기본입니다. 비록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반봉건의 시작이었고 시대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전봉준 삶에 저항이 있듯이 우리가 변화에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저희 집안은 천주교 집안이지만 저는 고등학교 때 청주 용화사 절에서 벽산 주지 스님을 도와 학생불교법회 활동을 했습니다. 사회에 나와서는 만년동에서 학원 부원장 시절 만년동으로 회관을 짓고 이사온 대전 YMCA에 자발적으로 찾아가 23년째 회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사회체육위원, 부위원장, 이사, 부이사장을 역임했습니다. 순수하게 청소년과 시민운동, 통일운동을 하고 있는 YMCA 정신을 깊이 공감하고 존중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죠. 대전 YMCA가 시민운동의 중심이 되는 시민단체로 온전히 자리매김하는데 협조하고 보람을 찾고 싶었습니다. 저는 뭘 하기 시작하면 꾸준히 하기 때문에 갈마초 운영위원회원도 8년, 월평3동 주민자치위원회도 10여 년 간 했습니다. 초,중, 고도 12년간 개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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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아는 만큼 보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에 호기심을 갖고 즐기는 편인데 갑천에서 자전거를 많이 탑니다. 치열하게 일하는 것을 좋아하고, 골프는 하지 않습니다. 그림 보며 지내는 시간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 사무실 벽에도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많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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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식 문학평론가님은 제 시집을 읽고 의식과 현장과 고발과 서정과 시대를 관통하는 안목에 깜짝 놀라셨다고 합니다. 저의 장점은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한다는 점인데 무엇이 합리적이며, 무엇이 이기주의적인지 아는 거죠. 저는 역지사지의 마음이 강합니다.
저는 문화를 즐기고, 예술을 사랑합니다. 문화를 알고 문화예술을 즐긴다는 것은 국민의 삶이 그만큼 윤택하다는 의미입니다. 경제가 안정되고 소득이 많아져 삶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꿉니다. 최선의 시작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애민정신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앞으로의 계획은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대담, 정리 한성일 편집위원(국장)hansung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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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충북 보은 출생.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에서 성장. 조치원 중고등학교, 한남대 법학과 졸업.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경제학과 졸업. 서강대 공공경제학 전공 경제학 석사. 영어학원 23년째 운영 중. 2019년 대전문학 신인상 수상. 대전문인협회 회원, 현재 대전시 서구의회 의장. 전 기독교청년회 대전 YMCA 부이사장, 전 더불어민주당 대전시당 대변인, 전 제7대 서구의회의원(예산결산특별위원장),전 제8대 전반기 서구의회의원(운영위원장),현 제8대 후반기 서구의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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