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가고싶었던 고향에 뜻밖에 가게되었다.
9월도 얼마 안남았던 어느날 밤에 한 통의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일본의 여동생에게서였다.
"언니,엄마 돌아가셨어…"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지않은 내용이었다.
몸에서 피가 다 내려가는 것 같았다.
저의 친정어머니는 5년 전에 자궁경부암 수술을 받으시고 항암치료를 받으셨다.
항암치료를 힘들게 몇번이나 받으시고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올해에 들어 암이 재발되어서 점점 쇠약해졌다고 한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에 방문했을때는 밭일도 하고계셨다.
방문 시는 여름철이어서 내가 좋아하는 노랑옥수수를 많이 심어났다며 밭에서 따오시고 집에 있는내내, 옥수수를 쪄주셨다.그 어머니의 옥수수를 이제는 먹을 수없게 되었다.
비행기표를 어렸게 구하고 새벽에 집을 나서, 밤7시 넘어서 고향에 도착했다.
역까지 남동생이 마중을 나와줬다, 남동생을 보니 눈물이 쏟아졌다.
여동생부부는 도쿄에 있고, 고향집을 지키면서 결혼도 하지않고 혼자서 부모님을 돌보고있던 남동생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 뿐이었다.
이번에도 집에서 어머니가 쓰러지신걸 발견했을때 얼마나 놀랐을까.....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만하다.
관 속에 누워계신 어머니는 그냥 주무시는 것 같아 돌아가셨다는 실감이 안 났다.
어머니가 생존에 가입하고 있던 상조보험 때문에 당황한 남동생이 상조회사 직원분들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 속에서도 장례를 잘 해냈다.
나는 장례식때는 이상하게도 그렇게 울지는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한국에 돌아가기 직전까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싶어서 집을 수리하고 청소하고 지냈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와 아버지를 혼자 돌봐야 했던 남동생이 마음에 많이 걸렸다.
맏딸로서 외국에 있다고해서 부모님께 아무 도움이 안되고 동생들한테 늘 미안한 마음뿐이였다...
한국에 돌아와서 여러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듣자, 비로써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때 못한 효도를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40일동안 날마다 상식을 올리는 것 뿐이다.
고향을 떠나서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든 분들의 마음속에는 " 나는 불효자다. "란 말이 지워지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되도록이면 가까이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수있다면 얼마나좋을까?
그러나 인생은 두가지를 선택할 수는없고, 거기에 대한 정답도 없다.
코로나가 조금씩 풀리고 해외에 나가는 문이 또다시 열린지금, 한사람이라도 많은 다문화가족들이 고향을 방문하여 한시라도 더 많이 부모님에게 효도를 할 수있으면 좋겠다.구로다 미키 명예기자(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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