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다쳐도 좋을 마음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

  • 오피니언
  • 풍경소리

[풍경소리] “다쳐도 좋을 마음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 승인 2024-09-15 15:06
  • 방원기 기자방원기 기자
조훈성 연극평론가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그 이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다. 이십 년 넘게 진행해온 '고마나루국제연극제'가 별안간 중단될 위기에 있다고 해서 개막식이 열리는 공주문예회관을 찾았다. 항간에 들리는 연극제 지원 배제에 대한 흉흉한 소문들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제를 명맥을 이으려는 시민, 예술인들이 십시일반 뜻을 모아 겨우 축제를 연다. 어디 속상한 게 연극제를 처음 만들고 애써 일궈온 사람뿐이랴, 함께 자리한 이들 모두가 분기가 있고, 눈가에 물기가 묻어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예술, 예술인을 제 액세서리쯤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방방곡곡의 극장과 축제장을 다니면서, 그 무대에 오르는 이들의 예술 정신을 다시금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일생을 고군분투하며 천착한 예술 작업에 대한 보답은커녕 변변치 않은 재원 여건과 갖은 구실을 대며 제 자리의 구미에 맞춰 지원이라는 명목 하에 줄을 세우는 이들이 누구인지 훗날 역사가 기록할 것이라는 말도 이제 성에 차지 않는다.

꿋꿋이 연극인의 길을 걷겠다는 개막 연단의 목소리들을 모아보니, 정작 먹고사는 값어치를 정신적 가치로, 승리로 둔갑시켜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2004년 고마나루전통축제로 시작하여, 2005년 고마나루전국향토연극제, 2020년 고마나루연극제, 2022년부터 고마나루국제연극제 등으로 축제 이름이 바뀌었던 역사도 어렴풋 기억이 난다. 그때마다 수도권 중심의 기성 연극을 탈피하고 지역 연극의 고유성을 반영한 지역문화 운동 확산을 위해 노력해보자라든지, 글로컬리즘을 앞세워 세계중심의 연극축제로 거듭나보자, 또 지역공연예술축제 네트워크를 구축해 권역별 예술제 벨트를 도모해보자면서 그렇게 수없이 지역 문화정책과 연동돼 밤새 숙의했던 시간도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러자니 내가 무슨 스무 해를 버텨온 것도 아닌데 이 서럽기까지 한 감정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

일주일 새, 연극영상을 수십 편은 본 것 같다. 그 가운데 몇 편은 '제3회 보편적이지만은 않은 극적무대'(24.6.6.~8.11.)라는 중견연출가들이 모인 연극제 작품이었는데, 극단 이야기가의<후성이네>(최재성 작·연출/7.31.~7.28./극장 봄)에 "빈 것이 있으면 채울 생각을 하지 않고, 치울 생각부터 한다."라는 대사가 있다. 어둑어둑한 무대에 종말을 앞둔 이의 목소리의 깊이가 남다르다. 언제 우리가 스스로 채우거나, 치웠던 몫을 가져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뒤늦게 채워지거나 치워지거나 피동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필요에 쓰임에 위태롭게 숨 쉬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생각이 든다. 딸아이는 만날 애달픈 이야기를 쓰고 있는 내가 측은했는지 자꾸 내 방을 기웃댄다. 그러곤 "아빤 왜 이렇게 가난해?"라고 가감 없이 한마디 뱉고 나간다. 순간 숨이 막혀, 퍼즈키를 누른다. '가난해'의 문장부호가 물음표인지, 느낌표인지 마침표인지 모를 일이다. 난 녀석에게 되묻지 않았다. '가난'에 대한 감정보다 제 쓸모를 다하지 못하고 사는 것 같았다. 예술을 한다는 것. 아니 그걸 바라본다는 것.

어머니 생신 전날, 미역국 끓이러 갈까 물었더니, 누이가 벌써 미역국을 끓여서 먹고 있다고. 내게 자기 걱정을 말라는데 웃음이 절로 샌다. 아무도 없을 땐 아들밖에 없다며 '나'부터 찾더니, 나 대신할 게 생기자마자 걱정을 말라고 해서다. 결국 외롭고 고독함의 실존을 느낄 때서야 '찾을 사람'을 찾는다. 마침 계절강의 강의료가 들어와서 숨통이 트였다. 연체된 각종 공과금, 카드값, 대출이자를 갚고 나니 자꾸 뒷자리들이 사라진다. 그래도 당신 생일이니 오후엔 오래간만에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 사드릴까 싶었는데,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신을 것도 마다하니 겨우 남은 기십 만원을 봉투에 넣는다. 모처럼 용두동의 좁은 거실이 꽉 찬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이렇게 다 모여서 처음 촛불을 분다. 이제 당신도 곧 여든인데, 어쩐지 내 자리가 위태위태하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려나. 저-쪽- 풍향을 알 수 없이 밀려온 바람이 내 센 머리를 밀어 올린다. 들고 있던 시집 한 구절을 꾸욱-꾹 눌러, "다쳐도 좋을 마음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정덕재, 정류장에 두고 온 뉴욕치즈케이크, 월간토마토, 2024)라고 쓰면서 뒷장에 음각 자국을 남긴다.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갑천 야경즐기며 워킹' 대전달빛걷기대회 5월 10일 개막
  2. 수도 서울의 높은 벽...'세종시=행정수도' 골든타임 놓치나
  3. 충남 미래신산업 국가산단 윤곽… "환황해권 수소에너지 메카로"
  4. 이상철 항우연 원장 "한화에어로 지재권 갈등 원만하게 협의"
  5.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1. 충청권 학생 10명 중 3명이 '비만'… 세종 비만도 전국서 가장 낮아
  2. 대학 10곳중 7곳 올해 등록금 올려... 평균 710만원·의학계열 1016만원 ↑
  3.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
  4. [춘하추동]삶이 힘든 사람들을 위하여
  5. 2025 세종 한우축제 개최...맛과 가격, 영양 모두 잡는다

헤드라인 뉴스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이제는 작업복만 봐도 이 사람의 삶을 알 수 있어요." 28일 오전 9시께 매일 고된 노동의 흔적을 깨끗이 없애주는 세탁소. 커다란 세탁기 3대가 쉴 틈 없이 돌아가고 노동자 작업복 100여 벌이 세탁기 안에서 시원하게 묵은 때를 씻어낼 때, 세탁소 근로자 고모(53)씨는 이같이 말했다. 이곳은 대전 대덕구 대화동에서 4년째 운영 중인 노동자 작업복 전문 세탁소 '덕구클리닝'. 대덕산업단지 공장 근로자 등 생산·기술직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곳으로 일반 세탁으로는 지우기 힘든 기름, 분진 등으로 때가 탄 작업복을 대상으로 세탁한다...

`운명의 9연전`…한화이글스 선두권 경쟁 돌입
'운명의 9연전'…한화이글스 선두권 경쟁 돌입

올 시즌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는 프로야구 한화이글스가 9연전을 통해 리그 선두권 경쟁에 돌입한다. 한국프로야구 10개 구단은 29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 '휴식 없는 9연전'을 펼친다. KBO리그는 통상적으로 잔여 경기 편성 기간 전에는 월요일에 경기를 치르지 않지만,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프로야구 5경기가 편성했다. 휴식일로 예정된 건 사흘 후인 8일이다. 9연전에서 가장 주목하는 경기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대전 한화생명볼파크에서 열리는 LG 트윈스와 승부다. 리그 1위와 3위의 맞대결인 만큼, 순위표 상단이 한순간에 뒤바..

학교서 흉기 난동 "학생·학부모 불안"…교원단체 "재발방지 대책"
학교서 흉기 난동 "학생·학부모 불안"…교원단체 "재발방지 대책"

학생이 교직원과 시민을 상대로 흉기 난동을 부리고, 교사가 어린 학생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학생·학부모는 물론 교사들까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경찰과 충북교육청에 따르면 28일 오전 8시 33분쯤 청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특수교육대상 2학년 A(18) 군이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 4명과 행인 2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A 군을 포함한 모두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경계성 지능을 가진 이 학생은 특수교육 대상이지만, 학부모 요구로 일반학급에서 공부해 왔다. 가해 학생은 사건 당일 평소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해 특..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2025 유성온천 문화축제 5월 2일 개막 2025 유성온천 문화축제 5월 2일 개막

  • 오색 연등에 비는 소원 오색 연등에 비는 소원

  • ‘꼭 일하고 싶습니다’ ‘꼭 일하고 싶습니다’

  •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