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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과수에서 34년을 근무하고, 이제는 대전에서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는 정희선 충남대 분석과학기술대학원장. /사진=이성희 기자 |
손으로 꼽기 어려운 타이틀을 지닌 정희선 충남대 분석과학기술대학원장.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검법남녀'나 '싸인'에서 풀리지 않는 진실을 밝혀내던 주인공이 오버랩 된다.
정 원장은 현재 30여 년간 몸담아온 국과수를 떠나 대전에서 분석과학 인재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그런 그가 지난달 4일 대통령 소속 제5기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위원에 위촉됐다.
과학수사 기관의 수장에서 캠퍼스 강단으로, 이제는 국가 생명윤리·안전에 대한 기본정책 심의에 참여하게 된 정 원장을 만나 한편의 드라마처럼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중도일보 독자들을 위해 간략한 본인 소개를 부탁한다.
▲숙명여대 약대 졸업 후 연구소와 대학원 진학을 놓고 고민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선택하게 됐다.
처음 국과수에 들어갔을 당시 여성들이 결혼하면 1~2년 이내 그만두곤 했다. 면접 볼 때 3년은 있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기에 그러겠다고 약속했는데 3년이 10번 흘렀을 즈음 연구소장이 되었고, 2010년 8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승격되면서 초대 원장이 됐다.
30년간 과학수사 연구업무에 종사하며 1980년대 우리나라 첫 소변 필로폰 검출 시험법을 개발해 마약사범 근절에 크게 기여했고 모발 검출법도 확립했다.
34년을 국과수에서 근무하고 2013년 충남대 분석과학기술대학원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국과수 시절 늘 절실했던 부분이 전문인력 부족이었고 고가의 외국산 장비를 제대로 쓸 줄 아는 인재를 키우겠다는 학교의 의지가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소속 제5기 생명윤리심의위원회 위원에 위촉됐다. 위원회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는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법률' 제7조에 따라 국가의 생명윤리·안전 관련 국가 최고 심의기구다.
제5기 위원회는 이윤성 국가생명윤리정책원장을 비롯한 과학계, 윤리계 민간위원 14명과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등 정부위원 6명으로 구성됐다.
해당 위원들은 임기 3년 동안 체세포 복제배아 연구와 유전자 검사 등 각종 생명과학 분야에서 제기되는 윤리적 문제에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국가의 생명윤리·안전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게 된다. 위원들은 객관적인 평가와 성찰로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를 적절하게 반영하려 노력할 것이다.
다만 아직 구체적 회의가 진행되지 않아, 일정과 주요 의제는 설명하기 어렵다.
-4차산업혁명시대, 첨단기술 발달 속에서 생명윤리의 중요성이 더 부각되는 것 같다. 중점적으로 들여다보는 사안이 있나.
▲대표적으로 연명의료결정법이 있다. 연명의료결정법은 지난 2016년 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올해 2월 시행에 들어가 6개월째를 맞았다.
국과수 재직 당시 기억나는 사회적 이슈가 있다. 1997년 서울 보라매병원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던 환자에 대해 가족들이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퇴원해 환자가 사망한 사건이다. 당시 만류했던 병원 측은 '환자가 사망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았지만 법원은 환자 가족에게 살인죄, 의료진에게 살인방조죄를 물었다.
하지만 10년 뒤, 존엄사를 인정하는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지난 2007년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김 할머니의 연명치료가 1년째 이어지자 가족들이 이에 대한 중단을 요구한 사건이다. 가족들은 평소 환자의 뜻이라며 연명치료 중단 소송을 제기해 결국 대법원이 존엄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개인적으로, 본인도 존엄사를 선택할 것이다. 이제는 '아름다운 죽음을 선택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 많이 확산 됐다고 생각한다.
-최초의 여성 국과수 소장·초대원장을 지냈다. 가장 보람된 일은 무엇인가.
▲국과수의 가장 큰 매력은, 과학자로서 전혀 모르는 물질이 무엇인지 끝까지 밝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다. 새로운 증거물을 접하게 되면 처음에는 어렵고 막막하지만, 집념을 가지고 끈기 있게 도전해 미지의 물질을 확인했을 때 다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된다.
무엇보다, 실험 결과로 인해 범죄사건이 해결될 때는 국민의 안전을 지킨다는 사명감과 더불어 억울한 사람을 억울하지 않게 하는 것, 사회정의와 국민의 안정을 위해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크다.
국과수에 의뢰되는 사건은 똑같은 사건이 없다. 그렇기에 늘 새로운 도전이었다고 생각된다.
-수많은 남성 연구자들 사이에서 국과수 최초 여성 소장이 된 노하우가 있다면?
▲이건 약간 자랑 같지만, '미래에 문제가 되겠다'고 생각해 개발한 것들과 관련된 사건들이 때마침 발생하곤 했다.
예를 들어, 처음에 국과수에 들어가 '가짜 꿀' 실험을 했다. 그런데 곧 가짜 꿀 제조업자들이 사회적 쟁점이 됐다. 또 미국에 가니 마약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쥐 오줌을 받아 실험을 통해 분석법을 만들어 놓았더니 우리나라 마약사범이 급증했다.
당시 국과수에선 여성이 인정받기 쉽지 않았다. 승진기회를 2번이나 놓쳤다. 그쯤되니 '나는 필요없는 사람인가 보다. 그만둬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책상에 마약사범들의 소변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이것만 하고 그만두자, 이것만 하고 그만두자… 하루하루를 일만 하다 보니 막상 사표 낼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돌아보니 일이 좋아서 견뎌낸 것 같다. 그 일들이 재미있고, 보람 있었다.
-대한민국 여성 과학자의 롤 모델로 꼽힌다. '유리천장'을 겪는 여성 후배들을 위한 조언 부탁한다.
▲중간과정까지 올라서지 못하는 여성들의 현실이 문제다. 여성 인재들이 핵심인재가 돼야 한다. 미래를 위해 여러 준비가 필요하겠지만 창의성, 전문성, 도전정신과 글로벌 역량을 갖추기를 조언한다.
열정을 품고 끝까지 하겠다는 근성과,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도록 전문성을 확실히 확보하는 것도 필요하다. 글로벌 역량을 갖추는 것 역시 세계 속에서 사는 우리에게 아주 필요한 덕목이다. 무엇보다도 본인의 분야에서 최고로 성장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또 한 곳에서 오랫동안 다니라고 조언하고 싶다.
근본적으로 젊은 여성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도록 국가가 육아문제를 해결해 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바람이 있다면?
▲분석기술은 과학계 심장이다. 이 같은 분석기술을 활용하는 세계 최고 연구장비 전문가를 배출해 내는 것이 최우선 목표다.
충남대 분석과학기술대학원은 대학 인프라를 활용해 우수 과학인력을 양성하자는 취지로 설립됐다. 지난 2일 대학원은 국과수·경찰청과 함께 과학수사 분석기술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다. 이공계 분야에 대한 관심제고와 함께 '오리엔트 특급살인과 과학수사'를 주제로 강연했다. 크로마토그래피 원리, 지문채취 원리, 혈흔분석 원리 등 어려운 과학수사와 관련한 분석과학기술분야를 재미있게 풀어내 학생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는 평을 받았다.
한 발 더 나아가, 과학수사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과학수사체험 학습을 통해 미래의 인재들에게 과학에 대한 흥미를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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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선 원장이 대영제국 지휘관 훈장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이성희 기자 |
숙명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후 영국 런던대 킹스칼리지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쳤다. 국과수 약독물과장, 마약분석과장, 법과학부장을 거쳐 국과수 최초 여성 소장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초대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충남대 분석과학기술대학원 원장으로 재직중이다. 여성 최초 국제법과학회장을 역임했고 마약분야 전문가로 현재 국제법독성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대영제국 지휘관훈장(CBE), 홍조근정훈장(2012), 비추미 별리상(2010), 여성과학자상(2007)을 수상했다.
고미선 기자 misuny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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