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필톡] 번 아웃 판사에게 재판받기 싫다

  • 오피니언
  • 우난순의 필톡

[우난순의 필톡] 번 아웃 판사에게 재판받기 싫다

  • 승인 2019-05-29 10:46
  • 신문게재 2019-05-30 22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번 아웃
어릴 적 꿈이 원양어선 타는 거였다. 지금 생각하면 엉뚱하지만 그땐 상상의 나래를 펴며 즐거움에 빠지곤 했다. 집 앞 야산엔 커다란 묘가 많았다. 잔디밭도 넓어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자치기, 삘기 뽑기, 겨울엔 비료포대 깔고 앉아 눈썰매도 타는 등 밥만 먹으면 거기서 살다시피 했다. 그곳에선 동네 앞 멀리 겹쳐진 산들이 아득히 보였다. 저 산 너머 먼 곳엔 어떤 세상이 있을까. 잔디밭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며 미지의 세계를 동경했다. 바다를 누비며 이국적인 항구 도시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풍경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렜다. 지금과는 달리 예전엔 아이들은 노는 게 일이었다. 철부지인 내겐 원양어선 타는 게 고된 일이 아닌 즐거움 가득한 놀이라고 여겼다.

친구가 얼마 전 회사를 그만뒀다. 자의 반 타의 반인 셈이다. 전에 하던 업무와 너무 다른 부서에 발령받았기 때문이다. 사측의 속셈을 뻔히 아는지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경영주에게 밉보이면 그런 식으로 제 발로 나가게끔 야비한 수법을 쓰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조에 가입했던 친구는 종종 자신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장담 못한다고 말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 못한 모양이었다. 막상 현실이 되자 친구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래도 잘 버틴다 싶었는데 결국 사표를 냈다. 상사의 모멸감에 참을 수 없어 홧김에 사직서를 던지고 나왔다고 했다. 문제는 징글징글한 회사를 박차고 나왔지만 후회가 되더란다. 친구는 불안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렸다. 난 친구에게 여태까지 일했으니까 이젠 놀아도 된다고 위로했다. 친구는 "내가 뭘 해야 즐거운 지를 모르겠다"며 난감해했다.

직장에 다니면서 퇴사를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직장에 다닐까. 자기계발은 허울 좋은 소리고 대개는 돈 때문에 다닌다.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천하의 소설가 김훈도 '밥벌이의 지겨움'을 토로했으니 말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고난의 역사를 살아냈던 터라 먹고 사는 게 중요한 문제였다.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 국가·사회적 당면 목표였다. 기성세대는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만 했다. 노동이 미덕인 시대로 야만의 근원이 발현하는 시대이기도 했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나사를 조립하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는 현대인의 노동중독을 예언했다. 과연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가 됐나.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프로그램이 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자연인'의 삶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그들이 그렇게 살기까지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마냥 앞만 보며 미친 듯이 일만 하다 어느 순간 브레이크에 걸려 심신이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그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 살기 식으로 자연의 품에 들어와 새로운 인생을 만났다. 그들의 생활은 노동이 아닌 유희다. 음식재료도 먹을 만큼만 자연에서 얻는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들은 한결같이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고 고백한다.



한달 전쯤 기자협회보에 흥미로운 기사가 있었다. 지금 언론사에 입사하는 90년대생의 가치관에 관한 얘기다. 보수적인 언론사에 발을 디딘 이들은 의사 표현이 확실하고 칼퇴근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대다. 내 시간 뺏기면서 번 아웃 상태로 일하기 싫고 회사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한다. '칼퇴근 판사에게 재판받기 싫다'는 메이저 언론사의 엘리트 기자가 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호모 루덴스』의 저자 요한 하위징아는 "문명은 놀이 속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이제 노동숭배에서 그만 벗어나고 놀아보자. 은퇴가 재앙이 되지 않으려면 노는 법을 익혀야 한다. 나는 개미보다 취미를 즐기는 베짱이가 좋다. 당신의 취미는 뭔가. <미디어부 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호서대' 연극트랙', 국내 최대 구모 연극제서 3관왕
  2. 아산시, 민관협력 활성화 워크숍 개최
  3. 천안법원, 공모해 허위 거래하며 거액 편취한 일당 '징역형'
  4. 충청남도교육청평생교육원, 노인 대상 도서관 체험 수업 진행
  5. 엄소영 천안시의원, 부성1동 행정복지센터 신축 관련 주민 소통 간담회 개최
  1. 상명대, 라오스서 국제개발협력 가치 실천
  2. 한기대 김태용 교수·서울대·생기원 '고효율 촉매기술' 개발
  3. 천안법원, 음주운전으로 승용차 들이받은 50대 남성 징역형
  4. 천안시의회 드론산업 활성화 연구모임, 세계드론연맹과 글로벌 비전 논의하다
  5. 세종시 '러닝 크루' 급성장...SRT가 선두주자 나선다

헤드라인 뉴스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 충청권 역주행...행정수도 진정성 있나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 충청권 역주행...행정수도 진정성 있나

행정수도와 국가균형발전 키워드를 주도해온 더불어민주당이 '해양수산부 이전' 추진 과정에서 강한 반발과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 대선 득표율(49.4%)을 크게 뛰어넘는 60% 대를 넘어서고 있으나 유독 충청권에서만 하락세로 역주행 중이다. 지난 7일 발표된 리얼미터와 여론조사 꽃, 4일 공표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충청권은 호남과 인천경기, 서울, 강원, 제주권에 비해 크게 낮은 60%대로 내려앉거나 그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2026년 충청권 지방선..

조국혁신당 대전시당, `검찰개혁 끝까지 간다`… 시민토크콘서트 성황
조국혁신당 대전시당, '검찰개혁 끝까지 간다'… 시민토크콘서트 성황

조국혁신당 대전시당이 12일 유성문화원에서 '검찰개혁 시민콘서트'를 열어 당원·시민들과 함께 검찰개혁의 필요성과 구체적인 방향 등을 논의했다. 이날 행사엔 황운하 시당위원장과 차규근·박은정 의원이 패널로 참여하고, 배수진 변호사가 사회를 맡아 진행했다. 이들은 조국혁신당이 발의한 검찰개혁 5법 공소청법, 중대범죄수사청법, 수사절차법, 형사소송법 개정안·검찰독재 정치보복 진상규명과 피해회복을 위한 특별법 등의 내용과 국회 논의 상황, 향후 입법 일정·전망을 설명했다. 차규근 의원은 "수사절차법과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통해 검찰의 무차별..

무더위에 수박 한 통 3만원 훌쩍... 농산물 가격 급등세
무더위에 수박 한 통 3만원 훌쩍... 농산물 가격 급등세

여름 무더위가 평소보다 일찍 찾아오면서 수박이 한 통에 3만원을 넘어서는 등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13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대전 수박 평균 소매 가격은 11일 기준 3만 2700원으로, 한 달 전(2만 1877원)보다 49.47% 오른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1년 전 2만 1336원보다 53.26% 오른 수준이다. 2020년부터 2024년까지 가격 중 최대·최소를 제외한 3년 평균치인 평년 가격인 2만 1021원보다는 55.56% 인상됐다. 대전 수박 소매 가격은 2일까지만 하더라도 2만 4000원대였으나 4일..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폐업 늘자 쏟아지는 중고용품들 폐업 늘자 쏟아지는 중고용품들

  • 물놀이가 즐거운 아이들 물놀이가 즐거운 아이들

  • ‘몸짱을 위해’ ‘몸짱을 위해’

  • ‘꿈돌이와 전통주가 만났다’…꿈돌이 막걸리 출시 ‘꿈돌이와 전통주가 만났다’…꿈돌이 막걸리 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