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시평] 시간과 시계

  • 오피니언
  • 중도시평

[중도시평] 시간과 시계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승인 2019-06-11 08:20
  • 고미선 기자고미선 기자
이승선교수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나라가 백성들에게 집을 사 줄 수 있습니다. '행복한 주택' 같은 이름의 정책을 펼쳐서 값싸게 집을 제공하거나 빌려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라 할지라도 개별 시민의 집 장롱에 소소한 행복까지 채워주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나라가 백성들에게 시계를 공짜로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백년 시계'라고 이름을 붙여도 흠잡을 데 없는 정확한 시계를 만들어 백성들의 손목에 하나씩 채워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국가라도 개별 시민의 손목시계에 덤으로 한 두 시간짜리 시침을 추가해 줄 수는 없습니다. 시계를 줄 수 있으나 시간까지 주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복지국가 시대에 꽤 그럴듯한 말처럼 여겨집니다.

비록 국가가 국민에게 시간을 만들어 줄 수 없다 하더라도 국민의 소중한 시간을 위해 국가가 해야 할 책무는 매우 뚜렷합니다. 국민이 가진 시간은 자유로운 일상생활과 존엄한 생명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생활의 자유를 구속하는 일은 국민이 가진 시간을 정지시키는 일입니다. 국민의 시간을 빼앗는 일은 생명을 앗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안전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소비할 수 있도록 국가가 국민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흉포한 제3자가 선량한 국민의 시간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시계를 사주겠다는 공허한 공약보다, 고장이 난 시계를 무료로 수선해 주겠다는 알량한 약속보다 국가가 먼저 해야 할 근원의 책무는 국민의 시간을 온전히 지켜내는 일입니다. 국가가 행복한 주택을 짓거나 백년 시계를 만드는 데 소요하는 재원 조성을 위해 국민이 묵묵히 납세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제 아무러한 재난과 위험에 빠졌을지라도 국가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천 길 낭떠러지에 홀로 빠졌다거나 만 길 바다 속에 외로이 갇혔을 때 대한민국의 구조대가 반드시 구하러 올 것이라는 확신을 국가는 국민에게 심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설령 시계의 시간이 죽어서 이국의 이름도 희미한 산하에 백골로 백년을 누워있을지라도 국가가 자신을 수습해 밥 짓는 소리 두런거리는 고향 마을 언저리에 묻어줄 것이라는 맹목의 믿음을 가지게 해 주어야 하겠지요. 그것이 국가가 국민의 시간을 지켜내는 방식일 것입니다.

항일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된 의사와 열사들의 기록조차 없이 버려진 주검을 맹렬하고 끈질기게 추적해 조국으로 모셔오는 일, 화살머리고지를 비롯 전국 산하 도처 무명의 계곡에 바람 마냥 잠들어 계신 용사들을 이미 늙으셨을 유족의 품으로 무사히 인도하는 일, 국경을 넘나들며 무심히 흐르는 장강 다뉴브의 실종 국민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침내 구하는 일은 국민의 잃어버린 시간을 복원해야 할 국가의 당연한 책무입니다. 2년 전 남대서양 바다에 가라앉은 스텔라데이지호에 승선한 국민의 유해를 확인하고도 모른척한 인양 회사와 우리 정부에 대한 비난이 거셉니다. 정부는 계약상 어쩔 수 없다는 설명을 내놓습니다만 국민의 시간을 지켜주어야 할 국가의 온전한 자세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며칠 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을 얻은 한혜경 씨가 산재신청 10년 만에 산업재해 승인 판정을 받았습니다. 2009년 근로복지공단은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법원도 4년 전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던 사안입니다. 국민의 소중한 시간을 정지시켰습니다. 평온해야 할 가족의 시간도 이지러졌습니다. 그 사이 기업은 10억 원짜리 '시계'를 건네며 한 씨를 회유하려 했다고 합니다만 한 씨는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한사코 그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재해를 입은 시민도 다른 국민의 시간을 지켜주기 위해 억대 시계를 과감히 거절하거늘 국가가 국민의 시간을 지키고 복원하는 일에 인색해서야 되겠습니까?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사이언스칼럼]기후변화가 바꾸는 일상, 우리가 바꿀 미래
  2. 대전교도소 메디컬센터 첫 진료개시…"교정처우 개선 우수모델 안정적 운영을"
  3. 천황봉 3D 스캔부터 계룡산성 발굴까지… 세계유산을 향한 발걸음 '활발'
  4. 재투표 앞두고 교수사회 내홍…통합 동력 확보할 수 있나
  5. 대전사랑메세나·한국자유총연맹 대전시지부·중구 청년센터 청년모아, 지역사회 나눔과 봉사 표창
  1. 역대 최대 2조 9102억 기초연구 예산… 핵심은 '지역 연구자 살리기'
  2. 대전 신규 아파트 입주에 동부권 초등학교 통학구역 재편…학생 배치 여건 고려
  3. [책으로 여는 미래] 읽는 아이에서 쓰는 아이로, 교실을 넘어 삶으로 대전동부교육지원청
  4. 대전스타트업파크 찾은 몽골·독일 대표단… 지역 기술력에 주목
  5.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살아있는 지구과학 교과서 울릉도서 '특별한 과학 탐험'

헤드라인 뉴스


3기 진실화해위, 충청 미군 민간인 희생 29명 `진실규명`

3기 진실화해위, 충청 미군 민간인 희생 29명 '진실규명'

3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상교)는 지난 3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제8차 위원회를 열고, 과거 2기 진실화해위원회 당시 '조사중지' 결정에 머물렀던 '충청지역 미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에 대해 한국전쟁 전후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으로 공식 인정하고 29명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번 결정은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규명되지 못하고 조사중지 상태로 남아있던 억울한 희생의 진상을 3기 위원회가 재조사해 진실규명 결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진실규명 결정이란 법에 따라 신청 사건 조사..

수능·내신 대전환에 국제중 인기…7년 새 지원자 73.6% 증가
수능·내신 대전환에 국제중 인기…7년 새 지원자 73.6% 증가

수능과 내신 평가체계 변화로 대입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중학교 단계부터 학업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수요가 국제중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특목고·자사고 진학 실적과 영어 중심 교육환경 등이 맞물리면서 국제중 선호도도 높아지는 추세다. 6일 종로학원이 분석한 2027학년도 국제중 지원 현황에 따르면 전국 5개 국제중 가운데 경쟁률을 공개한 4개 학교의 지원자는 8998명으로 집계됐다. 474명 모집에 평균 경쟁률은 18.98대 1로, 최근 7년 사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지원자는 2021학년도 5182명에서 2025학년도 8597명까지 꾸준히..

유성구 직원들의 손끝에서 피어난 국화축제…관람객 호응 `만발`
유성구 직원들의 손끝에서 피어난 국화축제…관람객 호응 '만발'

대전 유성구의 '제17회 유성국화축제'가 형형색색의 국화로 물든 도심 속 정원과 특별한 사연을 담은 조형물로 시민과 관광객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지난 10월 17일부터 11월 8일까지 유림공원과 유성천 일원에서 열린 이번 축제는 당초 11월 1일까지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관람객들의 높은 관심과 호응에 힘입어 일주일 연장 운영됐다. 특히 모든 국화조형물은 미술이나 조형을 전문적으로 배운 경험이 없는 유성구 직원들이 도면 없이 직접 제작하고 관리하는 작품이다. 이런 사실이 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관람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실제 한 관..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깊어가는 가을과 낙엽 깊어가는 가을과 낙엽

  • 난방용품 판매 준비 분주 난방용품 판매 준비 분주

  • 울긋불긋 물든 도심 울긋불긋 물든 도심

  • 대전 갑천4BL 청년주택 공급사업 기공식 대전 갑천4BL 청년주택 공급사업 기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