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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선생 |
처음의 이름은 응구(應九)라고 지어 불렀으나 후에는 규동(奎東)으로 개명을 했다.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는 "이상헌"이란 이름의 가명을 쓰기도 했으며, 아호(雅號)는 소소거사(笑笑居士)라고도 하고 도호는 의암(義庵)이란 아호도 사용했는데 의암이란 아호는 최시형 제2대 동학교주가 지어준 것이며 동학의 천도교에서 많은 신도들은 성사(聖師)라고 불렀으며 동학의 초대 최제우(崔濟愚)에 이어서 2대 최시형(崔時亨)의 뒤를 이어 동학의 제 3대 교주가 된다.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체구가 건장하고, 높은 의기와 넓은 도량으로 활달한 성품이었으며 열두 살 무렵에는 형이 면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는데 형이 공금 사십 냥을 관청에 납부하라고 심부름을 시키자 심부름을 가던 길에 어떤 사람이 추위에 길가에 쓰러져있는 것을 보고 업어다 주막에 눕힌 다음 30냥을 주어 음식을 주고 치료도 해주게 하고 관청에는 열 냥만 납부했다고 한다. 면장인 형은 공금을 써버린 까닭을 추궁하며 종아리를 때렸으나 끝내 그러한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의 사회제도에 불만을 품고, 마음이 맞고 뜻이 통하는 청년들을 규합하여 우두머리가 되어서 청주일대와 서울까지 활동무대를 넓히며 사회개혁운동을 펼치던 손병희는 1882년에 동학(東學)에 입도하고 도학의 학문을 닦는데 전념하였다.
그의 일상과 사람됨을 눈여겨보던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은 손병희의 인격이 비범함을 보고 수제자로 삼아서 성심으로 동학을 전수하게 된다.
1893년에 조정의 부정부패가 심화되어가자 동학의 접주 전봉준이 전라도 정읍에서 농민들과 동학교도를 합하여 봉기하여 관군에 항쟁하였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참전으로 실패하게 된다.
1897년에 제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손병희가 제3대 동학교주가 된 것은 최시형이 관군에 곧 체포되고 생명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임을 예견하고 미리 도학의 후일을 인품이나 사람됨이 걸출하였던 수제자 손병희에게 동학의 교주를 이양하였기 때문이다. 최시형이 예견했던 대로 이듬해에 최시형은 관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고문을 받다가 최시형은 감옥에서 명을 마치고 순교하였다.
교주가 된 손병희는 동학(東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천도교(天道敎)로 명칭을 바꾸어 개명을 하고 전국으로 순화면서 동학 천도교의 발전에 열정을 기울였다.
동학혁명은 일본군과 청나라까지 불러드려 동학혁명은 실패하고 동학혁명군을 이끌던 녹두장군 전봉준은 뜻을 같이하던 수하의 배신으로 관군에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 난지 123년이 되는 2018년도 올해 4월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종로사거리에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상이 국민들의 성금으로 제작하여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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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군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 장군(1855∼1895) 동상이 순국 123년 만에 종로 네거리에 세워졌다. 사단법인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는 지난 24일 오전 11시 종로구 서린동 영풍문고 앞에서 전봉준 장군 동상 제막식을 열었다. 전봉준 장군은 고부군수 조병갑이 농민들로부터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고 재산을 갈취하는 데 항거해 1894년 3월 농민들을 이끌고 봉기했다. 이후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한 전봉준 장군은 서울로 압송돼 전옥서(典獄署)에 수감됐는데, 이곳이 바로 종로 영풍문고 자리다. 전봉준 장군 동상은 국민 성금 2억7천만원을 모아 세워졌으며 원로 조각가 김수현 충북대 명예교수가 만들었다. 화강암으로 만든 좌대 위에 전봉준이 형형한 눈빛을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은 일본영사관에서 조사를 받은 뒤 가마 위에 앉아 압송되던 모습을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했다. 사진=연합DB |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천도교의 교세도 날로 높아가니 천도교의 신도가 100만 명을 넘는 성장을 이루었다. 동학의 본뜻인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을 일깨워 사람이 곧 하늘이니 지금의 세상이 이처럼 혼란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혼란한 때문이라면서 먼저 사람의 마음을 고쳐 안정시켜야 된다고 역설했다. 천도교로 명칭을 바꾼 것은 동경대전(東經大全) 에 도즉천도(道則天道)에서 인용하여 천도교(天道敎)라 하였다.
도(道)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이고, 후천개벽은 인심개벽(人心開闢)이며 인심개벽은 정신개벽(精神開闢)이라고 설파하였다.
1918년에 권동진, 오세창, 최 린 등과함께 독립운동을 대중화하는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1919년에는 2월 27일 밤에 독립선언문 2만 1천여 장을 비밀리에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 에서 인쇄하기에 이른다.
다음날에 가회동의 손병희 자신의 집에 민족대표 33인이 모여서 서울 파고다 공원 부근의 태화관 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3월 1일에는 독립선언 기념식을 한 뒤에 일본경찰에게 스스로 자진 출두하여 1920년 10월에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에 건강이 악화되어 1년 8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상춘원(常春園)에서 치료하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62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세상에 남긴 저서로는 수수명실록(授受明實錄), 도결(道訣), 명리전(命理傳)이 있으며, 천도태원설(天道太元說)과 대종 정의설(大宗正義說), 교(敎)의 신인시대(神人時代)와 무체법경(無體法經), 성심신삼단(性心身三端), 신통고(神通考), 견성해(見性解)를 저술하고, 삼성과(三性科), 삼심관(三心觀), 극락설(極樂說), 성범설(聖凡說), 진심불염(眞心不染), 후경(後經), 십삼관법(十三觀法), 몽중문답가, 무하사, 권도문, 삼전론 등등의 귀한 서적들을 후세에 남겼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충청북도 청주시 북이면 의암로 234(금암리 385-2번지)에 생가가 보존되어 있으며, 서울 종로구 종로로 99(종로 2가 38-1) 탑골공원 안에 손병희 동상이 건립되어 있으며, 묘소는 서울 강북구 우이동 254에 있다.
원종문 명인철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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