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무소의 뿔처럼 가라

  • 오피니언
  • 편집국에서

[편집국에서] 무소의 뿔처럼 가라

이해미 경제사회부 차장

  • 승인 2020-07-15 08:57
  • 이해미 기자이해미 기자
중도일보 이해미
이해미 차장
영화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에는 두 명의 여왕이 등장한다.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가문이자 정통 계승권자인 여왕 메리, 헨리 8세의 딸로 극강의 권력을 지닌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다.

영화는 메리 스튜어트가 프랑수와 2세와 사별 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한 일생을 그린다. 이 과정에서 사촌이지만 사실상 계승서열이 낮은 엘리자베스 1세와 편지로 주고받는 신경전, 서로의 미모와 패기 그리고 견고한 권력을 탐하는 대결 구도는 극 후반까지 팽팽하게 유지된다. 물론 결국 비운의 여왕으로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의 1세에 의해 참수당한다.

당시 중세유럽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은 여자였다. 참정권조차 없던 여자들이 왕가의 핏줄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 반대로 그들을 보좌하고 나라의 존망을 움켜쥔 대신들은 전부 남자다.

메리와 엘리자베스 1세의 신경전이 고조될수록 신하들은 종종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한다. "멀쩡한 남자들이 여자들 변덕스러움에 놀아나는 꼴이라니!"

물론 이 영화에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둘러싼 중세 유럽의 다툼도 있고, 권력과 정치에 대한 인간의 탐욕도 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몇몇 장면에서 남자 대신들은 자신들의 여왕을 향해 변덕스러운 여자들이라고 힐난한다.

사촌 메리를 참수한다는 서명 후 아무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엘리자베스 1세의 진짜 마음은 알지도 못하면서… 모두에게 배신당해도 가문을 지키고 내 자식을 지키려던 메리의 삶의 무게를 가늠해본 적 없으면서 '변덕스러운 여자'라고?

구구절절 영화 이야기를 늘어놨지만, "중세유럽이니까 그땐 그랬어"라고 그냥 스쳐 가기엔 그때나 지금이나 서로를 이해하려는 얄팍한 시선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제1세대 페미니즘 운동은 참정권을 갖기 위해서였고,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기반으로 2세대 페니미즘은 '평등'을 외쳤다. 그리고 3세대 페미니즘은 백인 여성의 전유물이라는 비판 속에서 성소수자 권리 운동으로 번져왔다. 페미니즘의 역사를 보니 그 뿌리는 한결같은 여성권리 신장이다.

영화 속 많은 대사와 스토리 가운데 유난히 변덕스러운 여자라는 대사에 꽂힌 건, 아마도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이 중세유럽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하고 반문해 본다.

지위도 있고 해결해야 할 일은 두 손 가득 쥐어 줬으나, 해낼 수 없을 거라는 부정적인 시선이 나를 휘감고 지나간다. 쟤는 변덕스럽고 예민해서 큰일은 못할 거야 라는 편협한 시선도 나를 마구 짓누른다. 어쩌면 이 글은 내가 나를 향해 내리는 일종의 판결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무소의 뿔처럼 가라, 대신 동료들의 손을 잡고.
이해미 경제사회부 차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늑구'가 비춘 그림자…대륙사슴·하늘다람쥐 우리곁 멸종위기는 '진행중'
  2. '충격의 6연패'…한화 이글스 내리막 언제까지
  3. 대전교육감 출마 예비후보자들 세 불리기 분주… 공약은 잘 안 보여
  4. [속보] 與 대덕구청장 후보 '김찬술'…서구 전문학·신혜영, 동구 황인호·윤기식 결선행
  5. 이춘희 전 세종시장 "이제 민주당 승리 위해 힘 모아야"
  1. 집 떠난 늑구 열흘째 먹이활동 없어…수색도 체력소진 최소화에 촛점
  2. '공기·물·태양광으로 비료 만든다' 대전기업 그린팜, 아프라카 농업에 희망 선사
  3. 원성수 세종교육감 예비후보의 진면목… 31개 현안으로 본다
  4. 김인엽 세종교육감 예비후보의 세대교체 선언… 숨겨진 비책은
  5. 세종보 천막농성 환경단체 활동가 하천법 위반 1심서 '무죄'

헤드라인 뉴스


행정통합 충청 지선 뇌관 현실화…野 "정치 사기" vs 與 "추후 지원"

행정통합 충청 지선 뇌관 현실화…野 "정치 사기" vs 與 "추후 지원"

좌초된 대전충남 행정통합이 6·3 지방선거 여야 최대격전지 금강벨트 뇌관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관측이 현실화 되고 있다. 정부 추경 예산안에 광주전남통합특별시 출범을 위한 예산이 누락 된 것이 트리거가 됐는 데 이를 두고 여야는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재명 정부가 매년 5조 원씩 총 20조 원 지원이라는 파격적 재정 특례를 내세워 통합을 밀어붙였지만, 정작 출범을 앞두고 기본 예산조차 확보하지 못하면서 충청권에서도 파장이 커지는 모습이다. 16일 정치권에 따르면 오는 7월 1일 출범을 앞둔 광주전남통합특별시에 필요한 예산 177억 원이..

6.3 지방선거 D-47… 대전·충남·세종 판세는 어디로
6.3 지방선거 D-47… 대전·충남·세종 판세는 어디로

매 선거마다 정치권의 캐스팅보터 역할을 해온 충청권 민심. 2026년 6.3 지방선거를 47일 앞둔 지금 그 방향성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대전 MBC 시시각각(연출 김지훈, 구성 김정미)은 지난 16일 오후 '6.3 지방선거 민심 어디로'란 타이틀의 시사 토크를 진행했다. 고병권 MBC 기자 사회로 김영식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와 연합뉴스 박주영 기자, CBS 김정남 기자, 중도일보 이희택 기자가 패널로 출연해 대전과 충남, 세종을 넘어 전국 이슈의 중심에 선 다른 지역 선거 구도를 종합적으로 살펴봤다. 시·도지사 선거는 국..

지역연고 구단 `대전 오토암즈`, 이스포츠 역사상 첫 그랜드 슬램 위업
지역연고 구단 '대전 오토암즈', 이스포츠 역사상 첫 그랜드 슬램 위업

'대전 오토암즈'가 이스포츠 대회에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며 '이스포츠 중심도시 대전'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한 구단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것은 프로 이스포츠대회 역사상 최초다. 대전 연고의 프로 이스포츠 구단인 '대전 오토암즈'는 창단 1년 만에 국내 이스포츠 대회 '이터널 리턴 마스터즈 시즌 10'에서 올해 2월에 열린 '페이즈 1'과 '페이즈 2'(3월 대회) 우승에 이어 파이널(4월 대회)까지 제패하면서 한 시즌의 모든 주요 타이틀을 석권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이번 대회에는 전국 12개 지자체 연고 구단들이..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늑구 탈출 관련해 사과하는 정국영 대전도시공사 사장 늑구 탈출 관련해 사과하는 정국영 대전도시공사 사장

  • 열흘 만에 돌아온 ‘늑구’ 브리핑 열흘 만에 돌아온 ‘늑구’ 브리핑

  • 세월호 순직교사 故 김초원 씨의 부모가 전하는 생일 축하인사 세월호 순직교사 故 김초원 씨의 부모가 전하는 생일 축하인사

  • 씨 없는 포도 ‘델라웨어’…전국 첫 출하 씨 없는 포도 ‘델라웨어’…전국 첫 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