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만필] 좀 늦어도 괜찮아

  • 오피니언
  • 교단만필

[교단만필] 좀 늦어도 괜찮아

문지초등학교 교사 김영태

  • 승인 2020-11-12 13:59
  • 이현제 기자이현제 기자
문지초 김영태
문지초등학교 교사 김영태
우리 반 학생 중에 Y라는 한 여학생이 있다. 예의도 바르고 성격도 밝은 Y에게는 말 못 할 고민이 하나 있는데, 바로 수학에 대한 공포감이다.

그래서인지 이 밝은 학생이 유독 수학 시간만 되면 늘 안색이 어두워지는 것이었다. 무언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더하기와 빼기부터 다시 공부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돌아가 기초부터 차근차근 공부하기로 우리는 결심했다.

일주일에 두, 세 번은 방과 후에 부족한 공부를 지도했고, 매일 숙제도 내줬다.

때로는 자존심이 상하거나 힘들 때도 있었겠지만, 참 고맙게도 Y는 최선을 다해줬다.



몇 달이 지나 지금 현재, Y는 6학년 수학 공부를 어려움 없이 척척 잘 해내고 있다. 조금 늦었지만, 서서히 수학에 흥미를 느끼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정말 기특하다.

나의 교직 생활도 마치 Y의 수학 공부처럼 늦게 시작했다. 20대 초반에 진로에 대한 고민이 길어지다 보니 친구들보다 군대도 늦었고, 대학도 늦고, 직장생활도 늦게 시작했다.

그래서 나에게 교사라는 직업의 의미는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고, 뛰어난 교사는 못 되더라도 열심히 하는 교사는 꼭 되겠다는 다짐 속에 지금까지 지내온 것 같다.

느리고 서툰 초임 학교에서는 모든 것이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수업, 생활지도, 업무처리, 학부모 상담 등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었다. 내가 하는 수업 방법이 과연 맞는 것인지, 학급운영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의문점도 많이 생겼었다.

업무처리도 빠르지 못해서 밤늦게까지 밀린 업무를 처리했던 적도 많았다. 힘들었던 초임 시절을 그래도 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늘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던 동료 선생님들 덕분이었다. 특히 발령 첫해 학년 부장님의 세세하면서도 따뜻한 조언은 초기 교직 생활 적응에 아주 큰 힘이 됐다.

처음으로 학교를 이동해 근무하게 된 두 번째 학교에서 나는 인생에 있어 더욱 큰 전환점을 맞게 됐다.

바로 결혼이었다. "뭐, 적절한 때가 되면 하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나의 결혼문제를 누구보다 걱정해준 사람은 바로 교장선생님이었다.

"한 살이라도 더 늦기 전에 빨리 가야지"라고 늘 관심 어린 걱정을 보내주시던 교장선생님께 나는 "인연이 닿는 사람이 생기면 가겠죠"라며 멋쩍은 웃음으로 늘 얼버무렸다. 이런 나의 안일함 때문이었는지 교장선생님께서는 당신만의 특단의 조치를 내리신 듯했다. 인맥을 총동원해 나의 미래 신부가 될 사람을 열심히 찾아주셨고, 얼마 후 나는 착하고 예쁜 고등학교 영어선생님과 처음 만나게 됐다.

이후 우리는 연애의 기간을 거쳐 백년가약을 맺게 됐다. 다른 부부들처럼 의견충돌로 다툴 때도 있지만, 알콩달콩 재미있는 신혼을 보내고 있다.

혼기가 꽉 찬 막내아들을 보며 늘 걱정이 많으셨던 우리 어머니께서는 교장선생님을 일컬어 내 인생의 '은인이자 귀인'이라고 하셨다.

지금은 학교를 떠나 교육청에서 아주 바쁜 나날을 보내시는 와중에도 "2세 소식은 아직 없느냐"며 애정 어린 관심을 늘 보내주고 계신다. 정말 감사하고 소중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늦는 것은 뒤떨어지는 것'이라고 자신을 자책하며 재수학원가를 방황하던 20대 초반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항상 더 앞서가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자신을 경주마처럼 채찍질하던 당시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내밀고 싶다. 그리고 말하고 싶다. "영태야, 좀 늦어도 괜찮아. 빨리 가는 것보다 올바로 가는 것이 더 중요하잖아. 넌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거야"
문지초등학교 김영태 교사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인천 연수구, 지역 대표 얼굴 ‘홍보대사 6인’ 위촉
  2. 시흥시, 별빛 축제 ‘거북섬’ 점등식
  3. 행정수도와 거리 먼 '세종경찰' 현주소...산적한 과제 확인
  4. "아산으로 힐링 가을여행 오세요"
  5. 대전 방공호와 금수탈 현장 일제전쟁유적 첫 보고…"반전평화에 기여할 장소"
  1. 호수돈총동문회, 김종태 호수돈 이사장에게 명예동문 위촉패 수여
  2. [경찰의날] 대전 뇌파분석 1호 수사관 김성욱 경장 "과학수사 발전 밑거름될 것"
  3. 초등생 살해 교사 명재완 무기징역 "비인간적 범죄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4. "일본에서 전쟁 기억은 사람에서 유적으로, 한국은 어떤가요?"
  5. KAIST 대학원생 2명중 1명 "수입 부족 경험" 노동환경 실태조사

헤드라인 뉴스


사실상 큰산 넘은 CTX… 행정수도 완성에 발맞춰야

사실상 큰산 넘은 CTX… 행정수도 완성에 발맞춰야

대전과 세종, 충북을 급행철도로 연결하는 '충청권 광역급행철도(CTX)'가 민자적격성조사 문턱을 넘을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조국혁신당 황운하 의원(비례)이 행정수도 세종 완성을 위한 CTX의 조기 개통 로드맵 마련을 주문했다. 황 의원은 21일 대전 동구 한국철도공사 본사에서 열린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의 한국철도공사(코레일)·국가철도공단·에스알(SR)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이재명 정부의 국정과제 50번에는 행정수도 세종 완성이 있고, 그 주요 내용을 보면 전국 접근성 개선에서 서울에서 1시간 전국 주요 도시에서 2시간 접근 가능한 교..

2025 AAPPAC 대전총회 개막…"지역의 영감이 세계로 확산되다"
2025 AAPPAC 대전총회 개막…"지역의 영감이 세계로 확산되다"

과학과 예술의 도시, 대전시가 세계 공연예술의 중심에 우뚝 섰다. 21일 대전예술의전당에서 개막한 '2025 아시아·태평양 공연예술센터연합회(AAPPAC) 대전총회'가 3일간의 일정에 돌입했다. '지역적 영감에서 세계적 영향으로(From Local Inspirations to Global Influences)'를 주제로 열린 이번 총회에는 세계 20개국 80여 개 공연예술 기관 관계자가 참석해, 지역이 품은 창의성과 상상력이 세계로 확산되는 길을 함께 모색했다. 첫 번째 세션 '세계 문화를 선도하는 K-컬처'에서는 한국 문화예술이..

대전 방사능 위협 여전한데…유성구 뭐했나
대전 방사능 위협 여전한데…유성구 뭐했나

대전 유성구 최대 현안 중 하나인 원자력안전 교부세 신설이 수년째 공회전을 거듭하고 있다. 21대 국회에서 입법이 좌절된 이후 올해 초 또다시 관련법이 제출됐지만, 상임위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성 나아가 144만 대전시민의 안전과도 직결된 사안인데 행정당국의 이슈파이팅 부족으로 현안 관철은 멀기만 해 보인다. 21일 취재에 따르면 지난 1월 더불어민주당 황정아 의원(대전유성을)이 대표발의 한 이른바 '원자력안전교부세법'(지방교부세법 일부개정안) 7월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 상정됐다. 현재 위원회 차원에서..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최고의 와인을 찾아라’ ‘최고의 와인을 찾아라’

  • 제80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 제80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

  • 즐거운 대학축제…충남대 백마대동제 개막 즐거운 대학축제…충남대 백마대동제 개막

  • 올 가을 들어 가장 추운 날…‘두꺼운 외투 챙기세요’ 올 가을 들어 가장 추운 날…‘두꺼운 외투 챙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