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디세이] 포토타임, 소설가 이중섭의 기억 한 장

  • 오피니언
  • 시사오디세이

[시사오디세이] 포토타임, 소설가 이중섭의 기억 한 장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승인 2022-04-11 08:33
  • 수정 2022-04-11 10:22
  • 신문게재 2022-04-12 18면
  • 윤희진 기자윤희진 기자
이승선 교수
이승선 교수

소년은 소녀를 사랑했다. 소녀도 마음이 같았다. 열여덟 살의 봄날, 소년은 군인들의 총에 죽었다. 암매장되었다. 시신을 찾지 못해 소년의 유품만 공원묘지에 묻혔다. 소년의 무덤에 작은 목비가 세워졌다. 소녀는 소년의 목비에 자기 이름도 써넣었다. 소녀는 소년과 영혼별 하나가 되고 싶었다. 소녀가 마흔 살의 여자가 되었을 때, 열사 묘역에 있던 소년의 몸도 주인을 찾았다. 디엔에이 검사 힘이었다. 소년의 유품과 목비는 민주열사 묘역으로 옮겨졌다. 새 묘비에 소년의 이름이 새겨졌다. 목비에 있던 소녀의 이름도 함께 왔다.

사내는 딸의 머리를 붙들었다. 아내는 딸의 다리를 잡았다. 방으로 딸을 끌고 들어가 침대에 눕혔다. 자폐증을 앓는 딸은 발작할 때마다 괴력을 발휘했다. 딸이 사내의 팔을 물어뜯으려고 발버둥 쳤다. 얼굴은 이미 할퀴었다. 사내는 온 힘을 다해 딸의 몸을 눌렀다. 딸은 괴성을 질렀다. 아내는 수건으로 딸의 입을 틀어막았다. 새벽이었다. 아내는 저녁에 먹일 약을 가져와 딸의 입에 털어 넣었다. 딸의 몸이 조금 늘어졌다. 아내가 그만 딸을 풀어주자며 눈물을 흘렸다. 힘이 소진된 사내의 누르기가 잠시 느슨해지자 딸이 벌떡 일어나 사내의 뺨을 때렸다. 따끔했다. 통증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사내는 다시 딸의 팔을 잡고 몸을 눌렀다. 아내가 사내더러 나가보라고 말했다. 물휴지로 얼굴을 대충 훔친 사내는 전철역으로 향했다. 첫 출근이었다. 늦었다.

사내는 조선의 궁궐을 지키는 군대의 병졸로 취직했다. 오방이었다. 오방기를 들었다. 사내는 조금 웃었다. 쉰이 넘어 낙하산을 타고 취업한 자리가 조선의 수문군 최말단 졸병 문지기였다. 딸과의 전쟁을 피하러 집 나와 취직을 했는데, 그곳도 날마다 가상의 전투와 진짜 싸움이 반복되는 복합 전쟁터였다. 작은 군대 안에서 일상의 자잘한 전쟁들이 치러지고 있었다. 사내의 군대는 하루 세 차례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궁궐수문군 교대식을 열었다. 행사 끝 무렵에 관람객을 위한 포토타임이 열렸다. 장끼 꼬리와 공작 털로 만든 전립을 쓴 수문장이 단연 인기를 얻었다. 왕의 교지를 든 승정원의 주서나 환도를 차고 홍립을 쓴 내시부의 사약 옆에도 관람객이 많았다. 사람들이 빠져나가면 대한문 앞 광장에는 휑뎅그렁하니 오방들의 오방기만 나부꼈다. 오방기를 든 사내는 자신이 영락없는 수문군 졸병 신세라고 생각했다. 고향 집 감나무가 그리웠다.

사내가 월도를 든 배역을 맡았던 날이었다. 포토타임이 되었다. 월도를 땅에 세우고 조각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한 여자가 사내에게 왔다. 사내의 기억 속에 한 올의 불빛으로 남았던 여자였다. 갈색 얼굴의 여자가 하얗게 웃었다. 서경이었다. 초등학교 일학년 봄 소풍 갔을 때, 목을 젖히고 웃는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소녀가 서경이었다. 소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선생이 되었다. 어떤 남자의 아내가 되어 아들을 낳았다. 열사 소년의 묘비에서 서경을 발견한 시댁 사람들이 그녀를 내쫓았다. 서경은 학교를 그만두었다. 덕수궁 말채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었다. 서경의 몸은 죽어가고 있었다. 조선의 수문군 오방이었던 사내는 주서로 승진했다.

이중섭이 쓴 <포토타임>의 일부다. 이중섭은 쉰일곱의 나이에 등단한 소설가다. 그때까지 작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불사신이다. 그의 스승이자 소설가인 김경에 따르면 이중섭은 남다른 연민과 통찰력을 가진 작가다. <포토타임>은 그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소년과 소녀와 사내가 겪어 낸 시대사를 덕수궁 정문 앞 광장의 수문군 교대식 행사로 엮어냈다. 수문군을 관람하는 관광객의 신산한 삶을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수문군의 시선으로 곡진하게 관찰한 일기다. 포토타임은 이념과 세대와 인종과 민족과 종교가 일시적이나마 적대를 유보하고 '평화'를 구축하는 시간이다.

 

<포토타임>은 또 말한다. 보는 자도 곧 보이는 자다. 찍히는 자도 찍는 자를 기억하고 기억에 기록한다. 시간의 기억 공간에서 일방적으로 찍기만 하는 자도, 찍히기만 하는 자도 없다. 포토타임 덕분에 사회적 진실을 끝내 침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포토타임은 스스로 말을 걸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암흑 속일지라도 불빛 같은 기억 한 장씩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삶의 바닥을 뒹구는 듯한 느낌에 빠질 때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시상수도사업본부 송익수 수질관리과장, 어버이날 기념 특별후원금 기탁
  2. 굿네이버스 대전지부, 다감커피 좋은이웃가게 현판 전달식
  3. 대전YMCA 청소년 장학회 함께 해요
  4. 지금 우리 가족 대화, 안녕한가요?
  5. 사랑의 사다리 밴드,대덕구 소외계층 80가정에 밑반찬 봉사
  1. 정림종합사회복지관 행복나눔 효(孝) 팔순잔치
  2. 초뭉이와 함께 하는 천사의 소원
  3. 동갑 배우 '강하늘·신혜선', 국세청 홍보대사로 재회
  4. 정부세종청사 옥상정원 '뷰 맛집'...혹서기 전 가보자
  5. 농식품부, 식품 및 외식업계와 간담회로 '물가안정' 유도

헤드라인 뉴스


대전시, 국내 유망기업 7개 사와 919억 원 규모 업무협약 체결

대전시, 국내 유망기업 7개 사와 919억 원 규모 업무협약 체결

대전시는 3일 대전시청 중회의실에서 국내 유망기업 7개 사와 919억 원 규모 투자, 200개 일자리 창출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날 협약식에는 이장우 대전시장과 대전상공회의소 정태희 회장을 비롯한 ▲㈜글로벌시스템스 박승국 대표 ▲㈜넥스윌 서원기 대표 ▲대한문화체육교육협회 김상배 회장 ▲㈜디엔에프신소재 김현기 대표 ▲㈜에스제이 김명운 대표 ▲㈜케이이알 김민표 상무 ▲㈜플레토로보틱스 박노섭 대표가 참석했다. 기업들을 산업단지별로 나눠 살펴보면, 유성구 장대산단으로 ▲전자전, AESA 레이다 시험장비 등 통신 전문업체인 ㈜넥스윌..

장애인활동지원사 급여 부정수급 수두룩…"신원확인·모니터링 강화해야"
장애인활동지원사 급여 부정수급 수두룩…"신원확인·모니터링 강화해야"

<속보>=대리 지원, 지원시간 뻥튀기 등으로 장애인 활동지원사 급여 부정수급 사례가 만연한 가운데, 활동지원사 신원확인과 모니터링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도일보 2024년 5월 2일자 6면 보도> 2일 취재결과, 보건복지부 장애활동지원 사업으로 활동하는 장애인활동지원사는 장애인의 가사, 사회생활 등을 보조하는 인력이다. 하지만, 최근 대전 중구와 유성구, 대덕구에서 장애인활동지원사 급여 부정수급 민원이 들어와 조사에 착수한 바 있다. 대부분 장애 가족끼리 담합해 부정한 방식으로 급여를 챙겼다는 고발성 민원이었는데, 장..

2025학년도 충청권 의대 389명 늘어난 810명 모집… 2026학년도엔 970명
2025학년도 충청권 의대 389명 늘어난 810명 모집… 2026학년도엔 970명

2025학년도 대입에서 충청권 의과대학 7곳이 기존 421명보다 389명 늘어난 810명을 모집한다. 올해 고2가 치르는 2026학년도에는 정부 배정안 대로 970명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대전지역 의대는 199명서 156명이 늘어난 355명을 2025학년도 신입생으로 선발하고, 충남은 133명서 97명 늘려 230명, 충북은 89명서 136명 증가한 225명의 입학정원이 확정됐다. 2일 교육부는 '2026학년도 대학입학전형 시행계획'과 함께 '2025학년도 의과대학 모집인원 제출 현황'을 공개했다. 2025학년도 전국 의대 증원 총..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덥다,더워’…어린이날 전국에 더위 식혀줄 비 예보 ‘덥다,더워’…어린이날 전국에 더위 식혀줄 비 예보

  • 도심 속 공실 활용한 테마형 대전팜 개장…대전 혁신 농업의 미래 도심 속 공실 활용한 테마형 대전팜 개장…대전 혁신 농업의 미래

  • 새하얀 이팝나무 만개 새하얀 이팝나무 만개

  • 2024 대전·세종·충남 보도영상전 개막…전시는 7일까지 2024 대전·세종·충남 보도영상전 개막…전시는 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