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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천 교수 |
그런데 이 영화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따로 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사대부 양반 윤서는 저잣거리에서 소설을 필사하는 것을 목격하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추월색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썼는데, 의금부 도사 광헌이 소설의 삽화를 그려 넣어 그야말로 장안의 최고 화제작이 되었다. 그리고 윤서의 소설은 필사되어 널리 퍼져 나가면서 후속되는 뒷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열렬한 독자까지 생겼다. 물론 영화의 결말은 결국 사건이 발각되어 작가 윤서는 귀양을 가게 되고 삽화가 광헌과 필사가 황가는 귀양 간 윤서를 찾아가 새 작품을 구상하는 발칙한 후일 도모로 끝난다. 영화 '음란서생'에서 촉발된 문제는 음란한 소설이었으며, 그로 인해 관련 인물들은 몰락하였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욕망과 호기심은 새로운 소설을 자극하였다.
영화 '음란서생'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한글 소설의 작가와 독자가 등장하고 소설을 향유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며, 바로 이 지점이 조선 후기 한글 소설의 성장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허균의 『홍길동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한글 소설이 창작되고 17세기 후반 이후 김만중의 『구운몽』(한글본), 『사씨남정기』 등의 한글 소설의 등장은 한글의 사용과 보급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와서 방대한 양의 소설이 필사본 또는 목판본으로 유통되었다. 그중 『춘향전』, 『심청전』 등의 한글 소설은 수백 종의 이본을 가지고 다양한 사람들에게 읽힐 정도로 역동성을 보여 주었는데, 이와 같은 한글 소설의 대중화에는 세책(貰冊)과 방각(坊刻)이라는 상업적 유통 방식이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저잣거리에서 소설을 읽어주면서 돈을 버는 강담사가 등장하고, 나아가 소설을 전문적으로 베껴 쓰고 돈을 받고 대여해 주는 세책이 서울을 중심으로 성행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선비나 부녀자의 일상생활에 대해 서술한 『사소절』에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한글 소설은 탐독해서는 안 되니 집안일을 버려두고 여자가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게 된다. 심지어 돈을 주고 그것을 빌려 읽다가 거기에 빠져서 가산을 기울인 사람도 있다"고 증언할 정도로 당시에 세책을 통한 한글 소설의 향유가 유행하였다. 영화 '음란서생'은 바로 한글 소설의 새로운 유통 방식 중에서 세책에 방점을 두고 영화적 상상력과 서사력을 집중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세책은 필사가 갖는 한계 때문에 독자의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반면에 민간에서 목판으로 만들어 대량으로 책을 출판하는 방각의 유통 방식은 다양한 독자의 요구와 상업적 동기에 부합할 수 있었다. 이에 방각이 더욱 활발하게 유통되면서 한글 소설이 널리 보급되는 데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즉, 책을 필사하여 대여해 주는 세책의 공급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한글 소설의 수요를 따라가지 버거웠지만 방각은 이러한 세책의 약점을 보완하여 한글 소설의 수요를 감당할 수 있었으므로 방각 소설이 성행할 수 있었다. 세책이 서울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었다면 방각 소설은 서울(경판본)과 전주(완판본)에서 많은 책이 간행되었는데, 이러한 한글 소설의 성행은 18세기 상업과 도시의 발달과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되어 소설의 상업적 출판이 경제 성장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즉, 농업이 발달하면서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고 이것이 시장에서 유통되면서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고, 그 파생적 효과로 인구가 증가되면서 중인 계급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으니 결국 이들은 한글 소설의 바람을 일으키게 되면서 조선 후기 새로운 사회 변화의 주체가 되었다.
한글 소설의 성장과 보급이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과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19세기 후반까지 200여종 이상의 한글 소설이 유통될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의 저변 확대에 하나의 방증 사례가 될 만한 일이다. 그리고 세책과 방각이라는 새로운 유통 방식을 통한 한글 소설의 성행은 조선 후기 들어와 평민의 자각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기운이 싹트는 데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올 여름 유난히 혹독했던 무더위 여름날에 영화 '음란서생'을 다시 보면서 조선 후기 한글 소설의 성장 과정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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