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뉴욕의 김환기에게 고향의 맛은 무엇이었을까

  • 오피니언
  • 우난순의 식탐

[우난순의 식탐] 뉴욕의 김환기에게 고향의 맛은 무엇이었을까

  • 승인 2025-06-25 17:45
  • 신문게재 2025-06-26 18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KakaoTalk_20250625_094419280
KakaoTalk_20250625_094346706
장맛비가 내리는 휴일 아침에 이불을 박차고 나오는 것은 쉽지 않다. 시계를 보니 8시 30분이 막 넘었다. 사과 한 개와 찐계란, 빵에 잼을 발라서 먹었다. 며칠 전 살구잼을 만들었다. 태어나 처음 해본 잼.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지지난 주말 아침 보문산에 가던 중 살구나무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가지가 찢어질 것처럼 살구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대사동 보문산 자락엔 오래된 집들이 많다. 그 중 길 가 높이 자리잡은 집에 역시 오래된 살구나무가 있다. 살구 익는 6월이면 길바닥에 떨어져 깨진 살구가 천지다. 재작년엔 어쩐 일인지 주인어르신이 비닐봉지에 가득 담은 살구를 2천원씩 팔아 맛있게 먹었다. 크기가 자그맣고 전체적으로 주황빛에 주근깨가 톡톡 박힌 볼빨간 빨강머리 앤의 뺨처럼 붉은 기가 도는 토종 살구다.

나는 고개를 들고 큰소리로 불렀다. "아저씨이!" 내 외침에 삽살개가 짖어대자 할아버지가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나를 내려다 봤다. 살구 안 파시냐고 물으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주인어르신 부부는 몇 년 전만 해도 정정했는데 어느새 허리가 바짝 굽었다. 나는 살구가 어쩜 이렇게 많이 열렸냐고 감탄을 연발했다. "작년엔 냉해 때문에 살구꽃이 제대로 피기 전에 다 저버려서 하나도 안 열렸는데 올해는 실하게 열렸어." 살구나무 아래엔 그물을 쳐 놓아 떨어진 살구 상태가 온전했다. 마침 할머니가 다라에 살구를 주워 담고 있었다. 나도 거들었다. 할아버지는 임자 만났다는 듯 집 자랑에 침을 튀겼다. "우리 집 전망이 기가 맥히잖어? 가끔 집 팔라고 오는 사람들이 있어. 카페 하기 좋은 터니께. 난 안 팔어." 내가 땅값이 비싸겠다고 하자 "여기선 젤 비싸지"라고 대꾸했다. 아닌 게 아니라 대전 시내와 식장산이 훤히 보여 눈이 시원했다. 인심 좋은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더 드려. 많이 드려"라고 재촉했다.

살구잼을 만들기로 한 것은 할아버지의 조언 덕분이었다. "살구는 버릴 게 없어. 잼도 맛있고. 씨도 얼매나 좋은 건디. 기침에 좋아. 콜드크림에 살구씨 가루 개서 얼굴에 바르면 피부도 좋구." 할아버지는 작년에 담근 살구잼 맛도 보여줬다. 며칠 후 퇴근하고 저녁을 먹고 잼 만들기에 돌입했다. 깨끗이 씻어 씨를 발라낸 살구를 믹서에 넣고 갈았다. 곱게 간 살구는 영락없는 호박죽이었다. 거기에 설탕을 붓고 센불에 끓이다가 불을 확 줄이고 뭉근히 끓였다. 시간이 지나자 되직해졌다. 그러더니 화산 분화구의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으면서 점액질이 위로 튀어올라 냄비 밖 사방으로 떨어졌다. 재빠르게 냄비 주위에 신문을 깔았다. 수저로 저으면서 '앗 뜨거'를 연발했다. 그런데 언제 불을 꺼야 하는지 가늠이 안됐다. 수저로 살짝 퍼서 쩝쩝거리며 맛을 계속 보는 사이에 결국 꾸덕꾸덕한 젤리가 돼버렸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데 잼도 타이밍일세. 다음엔 꼭 성공하고 말거야!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는 시도 있지만 고향을 떠난 사람에게 고향은 남다른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내 고향집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집 뒤에선 엄지손만한 보리수가 빨갛게 익어갈텐데. 6월 초 우리 가족은 1박2일 강원도 평창과 강릉을 다녀왔다. 우리는 강릉에서 '김환기 전시회'를 보는 감격을 맛봤다. 청록색 바탕에 별처럼 무수한 점들이 박힌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아득해진다. 안락한 자리를 박차고 나이 50에 뉴욕으로 떠나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한 화가. 김환기는 뉴욕의 밤하늘을 보면서 신안 안좌도의 고향 바다를 떠올렸을까. 작품에 매번 등장하는 푸른 점은 뉴욕에서 고국을 그리며 바라본 밤하늘의 별이기도 했을 터. 결핍은 예술가에게 창작의 원천이다. 그 시절 뉴욕의 김환기가 그리워한 고향의 맛은 무엇이었을까. <지방부장>
우난순 수정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천안시, 직원 대상 청렴·반부패 추가교육 실시
  2. 대한전문건설협회 대전시회, '중대재해 근절 성실·안전시공 결의식' 개최
  3. 대만 노동부 노동력발전서, 한기대 STEP 벤치마킹
  4. 한화이글스의 가을…만원 관중으로 시작
  5. 한화vs삼성, KBO 플레이오프 첫 경기 '접전'
  1. 한화이글스, 플레이오프 첫 경기 '승리'
  2. 아산시 영인면, 100세 이상 어르신에 선물 전달
  3. 순천향대, 공공의료서비스 개선 협약 체결
  4. 아산시가족센터, '2025 조부모-아동 행복 프로젝트' 진행
  5. ‘가을 물든 현충원길 함께 걸어요’

헤드라인 뉴스


일단 입학만 시키자?…충청권 대학 외국인 유학생 중도탈락률 급증

일단 입학만 시키자?…충청권 대학 외국인 유학생 중도탈락률 급증

국내 학령인구감소에 충청권 대학마다 외국인 유학생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지만, 들어오는 만큼 중간에 나가는 유학생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19일 국회 교육위원회 진선미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국내 학위과정 외국인 유학생 중도 탈락 현황'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충청권 4개 시도별 외국인 유학생 수는 늘고 있지만, 그만큼 중도탈락률도 급증했다. 대전의 경우, 들어오는 만큼 나가는 유학생도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대전권 대학의 외국인 유학생 수는 2020년 5810명, 2021명 6419명, 2022년 6988..

국감서 혹독한 평가 우주항공청, 대전에 연구개발 역량 집중해야
국감서 혹독한 평가 우주항공청, 대전에 연구개발 역량 집중해야

개청한지 1년 반이 지난 우주항공청이 국정감사에서 혹독한 평가를 받는 가운데 '우주항공 5대 강국 도약'을 위해선 대전을 중심으로 한 연구개발 역량 강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16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는 우주항공청의 운영 체계와 인력 구성 등 조직 안정성과 정책 추진력 모두 미흡하다는 질타가 쏟아졌다. "전문가들은 우주청의 구조적 한계로 '예산 부족'을 꼽는다. 올해 우주항공청 예산은 약 9650억원으로, 1조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모든 분야를 포괄하기엔 역부족인 규모다. 여기에 입지 문제도 크다. 우주청..

대전창작센터, 원로 예술인 특화 전시관으로 전환
대전창작센터, 원로 예술인 특화 전시관으로 전환

대전 미술의 창작 공간이던 대전창작센터가 20년 여정의 마침표를 찍고, 원로예술인 특화 전시관으로 전환된다. 19일 대전시에 따르면 대전창작센터는 옛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충청지원 건물로 故배한구(1917~2000) 선생이 설계한 것으로 등록문화재 10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표적인 한국 근대건축으로 평가받는다. 2005년 대전시립미술관은 한남대 건축학과 한필원 교수와 협력한 프로젝트 전시 <산책-건축과 미술>을 통해 문화시설로서의 재생 기능성을 확인하고 본격적인 프로젝트에 돌입, 2008년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으로부터 관리전환을..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올 가을 들어 가장 추운 날…‘두꺼운 외투 챙기세요’ 올 가을 들어 가장 추운 날…‘두꺼운 외투 챙기세요’

  • ‘가을 물든 현충원길 함께 걸어요’ ‘가을 물든 현충원길 함께 걸어요’

  • 빛으로 물든 보라매공원 빛으로 물든 보라매공원

  • 나에게 맞는 진로는? 나에게 맞는 진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