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시평] 종부의 삶, 허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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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시평] 종부의 삶, 허은의 노래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승인 2019-12-03 15:41
  • 신문게재 2019-12-04 22면
  • 고미선 기자고미선 기자
이승선교수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배 가죽이 등에 붙더라도 아들은 주인집 밥상을 얼씬거리지 않았다. 같이 놀던 주인집 아이가 저녁 밥상을 받았다. 아들은 슬그머니 일어나 대문을 나갔다. 모퉁이에 몸을 상처럼 펼치고 앉아 천자문의 글로 소리 밥을 지었다. 곡기 구경한 지 오래된 아들은 천자문을 다시 뒤에서 앞으로 읽었다. 아침나절에 달랑 호박죽 한 그릇 먹였던 어미는 눈을 돌렸다. 미안했다. 소학교를 졸업한 딸을 오라비와 함께 보육원에 보냈다. 딸은 거기서 중학교에 갔다. 병설 중학교에 사납금을 내지 못했다. 딸은 농사일을 거들었다. 어미는 미안했다.

아홉 살 소녀는 아버지 손을 잡고 국경을 건넜다. 1915년이었다. 친정의 가산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라졌다. 열여섯에 이 씨네 종부가 되었다. 아흔아홉 칸 큰 집의 만석꾼이던 시댁에도 땅이건 패물이건 돈이 될 만한 것은 남아 있지 못했다. 될 성 부른 것들은 이미 돈이 되어 독립군을 조련하고 독립 운동가를 먹이는 데 소진되었다. 시집을 왔더니 쌀독이 하나 있었다. 쌀은 한 알도 없었다. 물죽이라도 끓이려면 소금 간이라도 해야 했는데 간장 한 종지기 없었다. 남편? 붓으로 마당을 쓸지 못한다는 것 정도 겨우 알았다. 신흥무관학교에 간 남편은 아이 낳은 지 두 달 후 잠깐 왔다. 남편이 다시 온 것은 육년이 지나서였다. 일본군 초소를 부수고 잡혔다는 풍문이 흘러들었다. 감옥에 갇혔거나 어디 가서 죽었으려니 생각하고 살았다. 어미에게 그 때 남편은 소문이거나 바람이었다.

남의 나라 지붕일망정 거기에 푸른 하늘이 있었다. 독립 운동하던 종가 시어른과 항일 운동가들의 끼니를 마련하느라 어미는 그 하늘을 쳐다보지 못했다. 일궈먹지 않고 버려 둔 중국인의 산자락을 개간했다. 낫으로 나무를 베어내고 호미로 언 땅을 파서 씨앗을 뿌렸다. 밭 옆 초막에 아이를 눕혀두고 일하다 어둑해지면 발끝만 보고 집으로 왔다. 황량한 들길에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데 길 바쁜 시어미와 종부는 서로 말도 잊고 걸었다. 범람한 송화 강물이 소출한 곡식과 사람까지 쓸어가곤 했다. 일이 죽느냐 내가 죽느냐 둘 중의 하나다, 종부의 삶이 그랬다.

전쟁에 지고 달아나는 패잔 중국 군인의 패악질이 험했다. 전쟁을 이겨서 독가스처럼 은밀히 쳐들어오는 일본 군인의 총질은 더 야만이었다. 1932년 시할아버지가 운명했다. 해방을 위해 고국을 떠났던 그는 해방된 나라에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당장은 죽어서도 제 나라에 오지 못하고 남의 땅 외진 곳에 가묘 되었다. 60년 후 어렵게 돌아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일제가 조선을 불법 점령하자 친인척 50여 가구를 이끌고 간도로 갔던 석주 이상룡 선생이었다. 석주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냈다. 백범과 사이가 좋지 못했는지 그에 관한 백범일지 내용은 거칠다. 석주의 자손이 살부회를 조직했고 회원들끼리 서로 상대의 아비를 죽여주는 것을 규칙으로 한다고 백범은 썼다. 종부는 세상에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일이 기록에 남게 된 연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탄식했다.



종부는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의 죽음을, 시할머니와 시어머니의 죽음을, 한국 전쟁 중 남편의 죽음을, 큰 아들의 죽음을, 큰 며느리의 죽음을, 의용군에 끌려 간 작은 아들의 안 보이는 죽음을 보았다. 그리고 종부는 보았다. 주인집 밥상을 피해 골목에서 천자문을 외우던 아들이, 보육원에서 중학에 가던 딸이, 그의 형제자매들이 핏속에 자존심으로 남은 선대의 긍지를 끼니 삼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 냈음을. 그리고 종부는 또 보았다. 해방 후 우리 역사가 비굴하고 부당하게도 친일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종부 허은은 90세로 영면에 들었다. 그의 노래 '회상(回想)은 한 대학의 교지에 발굴 가사로 수록되었다. 종부는 남편 이병화 지사와 대전 현충원에 합장 되었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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