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시평] 세계 석학 염규호 교수, 초등학교 6학년 두 번 다니다

  • 오피니언
  • 중도시평

[중도시평] 세계 석학 염규호 교수, 초등학교 6학년 두 번 다니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승인 2018-11-13 09:59
  • 고미선 기자고미선 기자
이승선교수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폭염이 쏟아지는 한 여름 서울의 대학 교수회관 로비. 군데군데 백발이 성긴 교수 한 분이 묵직한 의자들을 요리조리 옮겼다. 얼추 강연장이 만들어졌다. 강의가 시작되었다. 미국에 유학을 하고 저명한 대학의 종신 교수로 임용된 과정을 나긋나긋 설명했다. 신문과 책 읽기를 좋아했던 그는 중학생 시절 운명처럼 '미국 25시'라는 책을 만났다. 가난한 한국 학생이 미국 생활을 견뎌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교수는 그 책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읽었고 그 책을 통해 인생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교수는 좌절당할 뻔 했던 어린 시절의 꿈을 이야기했다. 공부를 잘했으나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농사일을 거들고 집안일을 돌봐야 한다는 엄한 부친의 엄명 때문이었다. 염소에게 먹일 풀을 베거나 땔감용 나무를 구하러 산을 올라야했다. 노동하는 육체적 고달픔보다 중학생 친구들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간을 비껴가는 일이 더 고통스러웠다. 소년은 착해서 부모 속을 끓인 적이 없었다. 성실한 열네 살 소년 농부를 부모는 대견스러워했다. 소년의 가슴에 용광로처럼 끓는 꿈이 있었다. 소년은 중학교에 가야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낮의 노동이 끝나면 소년은 책을 꺼내 밤늦게까지 읽었다. 혼자 공부하는 소년을 보며 아버지의 마음도 차츰 눅어졌다. 어머니는 그의 든든한 교육 후원자가 되었다. 고향의 명문 중학교 입학시험 문턱은 높았다. 어지간히 공부했다간 낙방하기 십상이었다. 이웃에 사는 선생님의 배려로 소년은 초등학교 6학년을 다시 다녔다. 담임선생님의 후의를 평생 잊지 않고 살았다. 소년은 중학생이 되었다. '미국 25시'를 접했고 미국 유학을 하겠다는 새로운 꿈을 꾸었다.

그날 교수의 강의를 들은 청중은 딱 한 명.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열네 살 시골 중학생이 상경했다. 교수는 단 한명의 어린 청중을 위해 두 시간 동안 묻고 답하기 강연을 열정적으로 펼쳤다. 언론법의 세계적 권위자인 염규호 교수였다. 염 교수는 오래 전부터 '세계 속의 한국지성'으로 언론에 널리 소개되었다. 미국 남일리노이 대학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예일대와 옥스퍼드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미국의 가장 저명한 언론법학자 해리 스톤사이퍼는 염 교수를 "나의 제자 중에서 가장 똑똑하고 가장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라고 자서전에 썼다. 스승을 기리기 위해 염 교수는 아들의 이름을 해리라고 지었다. 스승의 이름으로 수여하는 언론법 연구상을 위해 염 교수는 기금을 만들었다.



염 교수는 4천명 가까운 미국 저널리즘 교육자와 실무가들로 구성된 미국언론학회(AEJMC) 회장을 역임했다. 염 교수는 오리건 대학 조나단 마샬 수정헌법 제1조 첫 번째 교수다. 염 교수의 논문은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필리핀 등 여러 나라의 대법원 판결에 인용되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려는 세계 각 국의 변호사들이 재판 자료에 염 교수의 논문을 인용한다.

며칠 전 서울에서 열한 번째 한국법률가 대회가 열렸다. 행사를 주최한 한국법학원장은 염규호 교수를 초청해 그의 논문발표를 듣게 된 것이 이번 대회의 가장 큰 성과라고 소회를 밝혔다. 염 교수는 논문에서 '파리 한 마리를 잡으려고 대형 쇠망치를 쓰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우려했다. 잊혀질 권리나 가짜 뉴스 운운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옥죄려는 유혹이나 압력이 가해질 때 한국의 입법자들이 아주 특별한 자기 절제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염 교수는 그의 고국이 '부분적으로만 자유로운' 나라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 보장을 통해 '완전한 민주주의'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염 교수에게 인생은 신나는 도전이다. 염 교수는 무엇을 했느냐보다 어떻게 해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천 명이 아니고 백 명도 아니고 단 한 명의 청중을 위해 혼신의 강연을 하는 일은 보통 사람으로선 언감생심 불가능한 일이다. 세계 석학 염규호 교수는 그 어려운 일을 언제나 묵묵히 그리고 기꺼이 해낸다. 보은을 행하는 사람의 징표다. 아무나 초등학교 6학년을 두 번 다닐 수 없는 일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성추행 유죄받은 송활섭 대전시의원 제명 촉구에 의회 "판단 후 결정"
  2. 김민숙, 뇌병변장애인 맞춤 지원정책 모색… "정책 실현 적극 뒷받침"
  3. 천안 A대기업서 질소가스 누출로 3명 부상
  4. 회덕농협-NH누리봉사단, 포도농가 일손 돕기 나서
  5. "시설 아동에 안전하고 쾌적한 체육시설 제공"
  1. 천안김안과 천안역본점, 운동선수 등을 위한 '새빛' 선사
  2. 세종시 싱싱장터 납품업체 위생 상태 '양호'
  3. 신탁계약 남발한 부동산신탁사 전 임직원들 뒷돈 수수 '적발'
  4. '세종교육 대토론회' 정책 아이디어 183개 제안
  5. ‘몸짱을 위해’

헤드라인 뉴스


이재명 정부 해수부 이전 강행…국론분열 자초하나

이재명 정부 해수부 이전 강행…국론분열 자초하나

이재명 정부가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을 추진하면서 국론분열을 자초하지 않을까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집권 초 미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위협 등 매크로 경제 불확실성 속 민생과 경제 회생을 위해 국민 통합이 중차대한 시기임에도 되려 갈등만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공론화 절차 없이 해수부 탈(脫) 세종만 서두를 뿐 특별법 또는 개헌 등 행정수도 완성 구체적 로드맵 발표는 없어 충청 지역민의 박탈감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해수부는 10일 이전 청사로 부산시 동구 소재 IM빌딩과 협성타워 두 곳을 임차해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두 건물 모두..

31년 만에 폐원한 세종 `금강수목원`...국가자산 전환이 답
31년 만에 폐원한 세종 '금강수목원'...국가자산 전환이 답

2012년 세종시 출범 전·후 '행정구역은 세종시, 소유권은 충남도'에 있는 애매한 상황을 해결하지 못해 7월 폐원한 금강수목원. 그동안 중앙정부와 세종시, 충남도 모두 해법을 찾지 못한 채 사실상 어정쩡한 상태를 유지한 탓이다. 국·시비 매칭 방식으로 중부권 최대 산림자원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 수 있었으나 그 기회를 모두 놓쳤다. 세종시 행정중심복합도시와 인접한 입지의 금남면인 만큼, 금강수목원 주변을 신도시로 편입해 '행복도시 특별회계'로 새로운 미래를 열자는 제안이 나왔다. 무소속 김종민 국회의원(산자중기위, 세종 갑)은 7..

신탁계약 남발한 부동산신탁사 전 임직원들 뒷돈 수수 `적발`
신탁계약 남발한 부동산신탁사 전 임직원들 뒷돈 수수 '적발'

전국 부동산신탁사 부실 문제가 시한폭탄으로 여겨지는 가운데 토지신탁 계약 체결을 조건으로 뒷돈을 받은 부동산신탁회사 법인의 임직원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대전지검 형사4부는 모 부동산신탁 대전지점 차장 A(38)씨와 대전지점장 B(44)씨 그리고 대전지점 과장 C(34)씨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수재등)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11일 밝혔다. 또 시행사 대표 D(60)씨를 특경법위반(증재등) 혐의로 함께 불구속 기소했다. A씨 등 부동산 신탁사 대전지점 차장으로 지내던 2020년 11월부터 2022년 4월까지 시행..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몸짱을 위해’ ‘몸짱을 위해’

  • ‘꿈돌이와 전통주가 만났다’…꿈돌이 막걸리 출시 ‘꿈돌이와 전통주가 만났다’…꿈돌이 막걸리 출시

  • 대전 쪽방촌 찾은 김민석 국무총리 대전 쪽방촌 찾은 김민석 국무총리

  • ‘시원하게 장 보세요’ ‘시원하게 장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