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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성 모습. |
낙엽을 걷어내는 정도의 두 차례 지표조사에서 이미 고려시대 군창기지와 생활시설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 발굴되고, 산성을 쌓을 때나 난을 피할 때 이용됐음 직한 옛길도 드러났다.
계룡산국립공원사무소가 금강문화유산연구원에 의뢰해 2017년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계룡산성에서는 이미 군창기지와 불교문화 그리고 백성들의 애환을 읽을 수 있는 유물이 상당수 발견됐다.
건물 지붕으로 사용됐을 기와 파편이 여러 장 출토됐는데 그중에는 '계룡산방호별감'과 '조 유성'이라는 새김이 발견됐다.
방호별감은 고려 후기 왜적과 몽고의 침략 때 이를 방어하기 위해 요지에 파견한 고려군의 지휘관을 말한다.
또 계룡산성에 사용된 기와들은 인근 대전 유성과 충남 청양 정산면 등지에서 제작돼 운반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서진 기와 중에 '†' 문양과 범어와 불교 관련 명문이 새겨진 수막새편이 출토돼 산성 내에 사찰이 존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지표조사를 통해 석축 산성이 둘러싼 내부 면적은 최소 60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는데 내부에 다양한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성 내부 시설물 중 가장 중요한 곳으로 여겨지는 '장대지'에는 계룡산방호별감 기와와 모양새김 기와들이 집중적으로 출토됐다.
대형 기단석렬들이 열을 지어 노출돼 있어 적의 침략 시 군을 지휘하는 장소이거나 군창지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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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산성에서 공주와 논산 방향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망대지가 발견됐고, 지하에 공동화된 구조를 지닌 시설물도 있을 것으로 추정됐다.
계룡산성은 남쪽 신원사 방향에서 백성들이 올라가고 물자를 공급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옛길 흔적도 나왔다.
계룡산성이 언제 운용되고 폐성됐는 지 문헌기록이 없으나 이길구 계룡문화연구소장은 조선후기 오재정(1641∼1709)이 1693년 계룡산 산행을 하면서 적은 기행문에서 계룡산성 존재를 설명하는 글을 발굴해 2016년 보고한 바 있다.
이 같은 조사에도 불구하고 계룡산성은 충남도는 물론 문화재청에 산성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계룡산국립공원사무소 관계자는 "두 차례 지표조사를 통해 문화재 지정에 필요한 충분한 조사가 이뤄졌고 신청하는 절차를 시작한다"라며 "중부권 최대 규모인 계룡산성 위상을 확립하겠다"라고 밝혔다.
공주=박종구·세종=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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