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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종학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30년도 넘은 법과대학 신입생 시절, 겨우 빡빡머리를 벗어나 참으로 경외감(?)을 갖고 들어간 법학 수업에서 교수님을 통하여 배운 법학의 시작점은 갑(甲), 을(乙), 병(丙)이었다. "갑이 을로부터 A 토지를 매수하였으나 미처 소유권이전등기를 해가기 전에 을이 위 토지를 다시 병에게 이중으로 매도하고, 병이 자기 앞으로 먼저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하였을 때, 갑이 주장할 수 있는 법적 근거로는 무엇이 있을까?" 또는 매매계약서를 작성하면서 "매도인을 갑이라 하고, 매수인을 을이라 한다." 뭐, 이런 식이었다. 이때의 갑과 을은 단순히 법률관계를 설명함에 있어 편의상 부르는 당사자의 약칭에 불과하였다. 그 이후로 법조 영역에 기대어 살아오면서 여전히 갑, 을, 병을 떠나지 못 하고, 오늘도 내가 선생이 되어 학생들에게 갑, 을, 병으로 법이론과 법률관계를 강의하고 있다. 아마도 법조계를 떠나는 그 순간까지는 이들 용어와 같이 살아가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지 갑과 을이라는 용어는 더 이상 법률관계에서 편의상 붙이는 용어가 아닌 경제적, 사회적, 권력적 우월적 지위에 있는 갑과 그를 통하여 끝없는 고통을 당하는 약자적 지위의 을이라는 용어가 되어 우리 사회의 극심한 불평등과 불합리한 관계를 적나라하게 상징하는 '사회언어'가 되었다.
갑질, 갑의 횡포, 을지로위원회 등으로 표현되는 단어들이 바로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 용어는 단순히 경제적 영역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사회 전영역에 퍼져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 준다.
사업주의 피고용인에 대한, 권력자의 비권력자에 대한, 재벌의 중소기업에 대한, 교수의 학생에 대한, 남성의 여성에 대한, 상급자의 하급자에 대한, 고객의 서비스 담당자에 대한, 정규직의 계약직에 대한, 금수저의 흙수저에 대한 갑질의 횡포는 사회 곳곳에 만연되어 있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러한 현상이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면서,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갑질문화를 시급히 척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로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혹시 우리가 둘러보아야 하지만 미처 간과하고 있는 것은 없을까? 우리 모두는 본인은 갑의 횡포를 겪은 적은 있지만 갑질을 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아니 갑질을 할 위치인 갑이 아닌 피해만 당하는 을의 위치에만 있는 것으로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껍질만 속으로 살짝 들어가 보자. 재벌로부터 갑질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 사장은 힘없는 부하 직원이나 납품업자에게, 감독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코치는 다시 자신의 후배나 선수에게, 사장에게 당한 직원은 다시 하급자에게 또 다른 갑질을 한 적은 없는 것인지? 적어도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답할 수는 없지 않을까? 요는 나도 그 누군가에게는 갑일 수 있고, 나의 행동이 크고 작은 갑질로 전달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점에 대한 인식에 둔감하다면 우리 사회의 갑을문화는 결코 쉽게 고쳐질 수 없을 것이다.
갑을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되짚어 볼 일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확실한 인식을 공유하여야 한다. 우리 모두는 같은 인간임을, 대한민국의 최고법인 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갖는다고 천명하고 있고, 그 헌법은 서슬 퍼렇게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그러기에 생활영역 곳곳에 퍼져 있는 갑질문화는 단순히 나쁜 문화가 아닌 반인간적이자 반헌법적인 행태임을... 손종학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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