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칼럼]20세기말 과학 지성의 대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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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칼럼]20세기말 과학 지성의 대이동

정영욱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

  • 승인 2020-02-13 15:57
  • 신문게재 2020-02-14 22면
  • 임효인 기자임효인 기자
정영욱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
정영욱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
1991년 말 내부의 몰락과 연방 국가들의 독립이 이어지면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 체계는 채 70년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연방은 총 15개의 독립국가로 분할됐고 동구권과 구소련 국가의 생활 수준은 1920년대 대공황보다 더 나쁜 수준으로 떨어졌다. 서구와 대등한 수준의 과학기술과 인력을 보유하고 있던 소련의 몰락은 자연스레 수많은 과학 두뇌들의 유출로 이어졌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발표에 따르면 불과 10년 만에 약 50만 명의 과학자가 러시아를 떠났고 대부분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상대적으로 환경이 좋은 유럽과 미국으로 옮겨갔다.

지성의 대이동이 인류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1930년대에 유럽의 지성들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을 피해 대서양을 넘어 미국으로 대거 이주했다. 그곳 신천지에서 고국에 남았더라면 결코 얻을 수 없었을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세계대전 후 미국의 눈부신 발전에 이들의 공헌이 지대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대(大) 이주도 20세기 초·중반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지만 모든 분야에 걸친 망명자 수가 2000여명 정도라고 하니 20세기 말 소련 붕괴에 따른 인재 이동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만하다.

정확한 자료를 찾기는 쉽지 않지만 미국으로 이주한 러시아 과학자는 소련 붕괴 이후 10년간 대략 1만 명 정도라고 한다. 유럽에서는 독일로 이주한 과학자들이 가장 많았다. 독일의 친 이민 정책의 영향도 있었지만 통일 전 동독이 러시아어를 사용한 데다 통일 후에도 그 지역에 많은 연구소가 운영된 점도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20세기 초 가장 많은 두뇌를 떠나보냈던 독일이 60여년 후에 가장 적극적으로 러시아 과학자들을 받아들이면서 다시 황금기를 누리게 됐다는 사실이다.

1993년 초 필자는 막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원자력연구원에 발을 들였다. 필자는 가속기로 빛을 발생시키는 분야를 연구했는데 그 분야에서 러시아는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서방의 누구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최고의 능력을 가진 과학자와 공학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단절돼 있었던 탓에 극소수의 대표 과학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서방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 당시 미국에서 독보적이었던 노 과학자가 새로운 개념이 담긴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노 과학자의 회심의 논문은 나에게도 당시 교과서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나중에 러시아 과학자들을 만나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그들은 이 논문이 발표되기 이전에 이미 그 개념을 바탕으로 실제 장치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별처럼 반짝이던 러시아 과학자들은 본인들이 지도하던 학생보다도 훨씬 더 한심한 초짜 연구원인 필자와 대전에서 공동연구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러시아 정부는 연구소 운영비를 댈 수 없어 문 닫는 연구기관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나마 경쟁력이 탁월했던 일부 연구소는 외국 연구기관으로부터 용역을 수주하며 근근이 버틸 수 있었다. 필자가 만났던 과학자들이 이에 해당했다. 역사가 잉태한 그들의 비극이 적어도 내게는 짧은 기간에 도약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였던 것이다. 나의 스승이었던 그 분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친구로 자처했고 어렵고 힘든 문제가 생길 때마다 망설임 없이 함께 해결해 주었다. 그 분들 중 일부는 아쉽게도 이미 돌아가셨다. 초짜 연구원이었던 필자도 어느덧 첫 만남 속 그 분들만큼 나이가 들었다. 돌이켜보면 러시아발 과학 지성의 대이동이 비록 우리나라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필자에게는 과학자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회와 인연을 만들어 주었다. 정영욱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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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명곡이 재조명받는다. 1990년대 옷 스타일도 다시금 유행이 돌아오기도 한다. 이를 이른바 '역주행'이라 한다. 단순히 음악과 옷에 국한되지 않는다. 상권은 침체된 분위기를 되살려 재차 살아난다. 신규 분양이 되며 세대 수 상승에 인구가 늘기도 하고, 옛 정취와 향수가 소비자를 끌어모으기도 한다. 원도심과 신도시 경계를 가리지 않는다. 다시금 상권이 살아나는 기미를 보이는 역주행 상권이 지역에서 다시금 뜨고 있다. 여러 업종이 새롭게 생기고, 뒤섞여 소비자를 불러 모으며 재차 발전한다. 이미 유명한 상권은 자영업자에게 비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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