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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융복합양자과학연구소장 |
할리우드로 대변되는 미국의 대중문화가 문화적 영향력의 대표 사례로 꼽히지만, 영국 문화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우리는 작은 나라지만 위대한 나라입니다. 셰익스피어, 처칠, 비틀즈, 션 코네리, 해리포터, 데이빗 베컴의 오른발…"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 영국 수상으로 분한 휴 그랜트가 극 중 영국을 설명한 이 대사에서 자부심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강국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은 두말할 나위 없다.
비록 평소에는 예술과 축구에 가려져 있지만 과학계에서도 영국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아이작 뉴턴과 스티븐 호킹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의 별들이 명멸한 곳임은 차치하더라도, 세계 3대 과학저널 중 첫째로 꼽는다는 네이처를 비롯해 수많은 과학저널과 대중서가 영국에서 발행되고 있다. 그뿐인가. 은하계를 떠도는 아서 덴트와 시간여행자 닥터 후의 나라기도 하다.
이와 같은 성공은 영어가 과학의 언어로 공고히 자리 잡은 덕도 있지만, 결코 무시 못 할 전통과 실적을 쌓아올린 대학과 연구소가 배경에 있다. 영어권 대학 중 가장 오래된 옥스퍼드대학교가 대표적이다. 고풍스런 건물이 가득한 대학교에서 남쪽으로 30분가량 차로 이동하면 목가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러더퍼드-애플턴 연구소가 있다. 옥스퍼드대학교와 러더퍼드-애플턴 연구소를 끼고 있는 이 지역에는 세계적인 기술기업들이 점재해 있다. 이들 기술기업의 활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옥스퍼드의 한 기업에서 구매하려던 연구 장비가 너무 비싸 다른 곳을 알아봤더니 그곳 역시 옥스퍼드에 있더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구단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러더퍼드-애플턴 연구소 중성자-뮤온 연구시설 앞에 휘날리는 수십 개 국가의 국기는 영국이 과학에 접근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러 나라가 이 시설과 동반 관계를 맺고 있으며 다양한 국적을 가진 과학자가 일하고 있다. 필자가 며칠간 이 시설의 연구 장비를 이용하기 위해 들렀을 때, 온갖 편의를 제공해 준 현지 사무원에게 왜 이렇게 외국 과학자에게 지나칠 정도의 친절을 베풀어주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은 당신도 영국 과학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개방적 태도는 영국에 한정되지 않으며 유럽의 다른 대형연구시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랜 세월 우리나라에서 과학 기술은 군사력과 경제력이라는 하드 파워를 위한 주춧돌이었고, 현장의 과학자들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국가 산업 발전을 위한 연구 경쟁에 몰입해왔다. 이런 분위기에서 과학의 다른 측면인 개방성과 국제성, 그리고 공유의 정신은 별반 강조되지 못했다. 연구개발 예산이 영국 못지않은 규모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과학이 소프트 파워로 만족스럽게 활약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변화의 물결은 이미 우리 곁에 다가왔다. KAIST와 기초과학연구원을 비롯하여 다수의 대학, 연구소가 세계 곳곳에 대한민국의 과학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도 '국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만큼 세계를 향해 활짝 열린 문이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대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연구단지에 세계적 규모의 중성자 연구시설 하나로를 품고 있고 그리 멀지 않은 오창에 첨단 방사광가속기가 세워진다. 대전이 과학을 통해 우리나라 문화적 영향력의 본산이 되기를 기대한다. 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융복합양자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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