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칼럼]소프트 파워로서의 과학

  • 오피니언
  • 사이언스칼럼

[사이언스칼럼]소프트 파워로서의 과학

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융복합양자과학연구소장

  • 승인 2020-09-24 16:59
  • 신문게재 2020-09-25 18면
  • 임효인 기자임효인 기자
박승일 융복합양자과학연구소장 new
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융복합양자과학연구소장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가 얼마 전 '소프트 파워'를 대체할 쉬운 우리말로 '문화적 영향력'을 선정했다고 한다. 어느 때보다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만큼 시의적절한 시도다. 마침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올랐다는 소식도 전해져서, 나날이 커지는 우리나라의 문화적 영향력에 흐뭇함을 감출 수 없다.

할리우드로 대변되는 미국의 대중문화가 문화적 영향력의 대표 사례로 꼽히지만, 영국 문화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우리는 작은 나라지만 위대한 나라입니다. 셰익스피어, 처칠, 비틀즈, 션 코네리, 해리포터, 데이빗 베컴의 오른발…"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 영국 수상으로 분한 휴 그랜트가 극 중 영국을 설명한 이 대사에서 자부심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강국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은 두말할 나위 없다.

비록 평소에는 예술과 축구에 가려져 있지만 과학계에서도 영국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아이작 뉴턴과 스티븐 호킹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의 별들이 명멸한 곳임은 차치하더라도, 세계 3대 과학저널 중 첫째로 꼽는다는 네이처를 비롯해 수많은 과학저널과 대중서가 영국에서 발행되고 있다. 그뿐인가. 은하계를 떠도는 아서 덴트와 시간여행자 닥터 후의 나라기도 하다.

이와 같은 성공은 영어가 과학의 언어로 공고히 자리 잡은 덕도 있지만, 결코 무시 못 할 전통과 실적을 쌓아올린 대학과 연구소가 배경에 있다. 영어권 대학 중 가장 오래된 옥스퍼드대학교가 대표적이다. 고풍스런 건물이 가득한 대학교에서 남쪽으로 30분가량 차로 이동하면 목가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러더퍼드-애플턴 연구소가 있다. 옥스퍼드대학교와 러더퍼드-애플턴 연구소를 끼고 있는 이 지역에는 세계적인 기술기업들이 점재해 있다. 이들 기술기업의 활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옥스퍼드의 한 기업에서 구매하려던 연구 장비가 너무 비싸 다른 곳을 알아봤더니 그곳 역시 옥스퍼드에 있더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구단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러더퍼드-애플턴 연구소 중성자-뮤온 연구시설 앞에 휘날리는 수십 개 국가의 국기는 영국이 과학에 접근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러 나라가 이 시설과 동반 관계를 맺고 있으며 다양한 국적을 가진 과학자가 일하고 있다. 필자가 며칠간 이 시설의 연구 장비를 이용하기 위해 들렀을 때, 온갖 편의를 제공해 준 현지 사무원에게 왜 이렇게 외국 과학자에게 지나칠 정도의 친절을 베풀어주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은 당신도 영국 과학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개방적 태도는 영국에 한정되지 않으며 유럽의 다른 대형연구시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랜 세월 우리나라에서 과학 기술은 군사력과 경제력이라는 하드 파워를 위한 주춧돌이었고, 현장의 과학자들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국가 산업 발전을 위한 연구 경쟁에 몰입해왔다. 이런 분위기에서 과학의 다른 측면인 개방성과 국제성, 그리고 공유의 정신은 별반 강조되지 못했다. 연구개발 예산이 영국 못지않은 규모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과학이 소프트 파워로 만족스럽게 활약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변화의 물결은 이미 우리 곁에 다가왔다. KAIST와 기초과학연구원을 비롯하여 다수의 대학, 연구소가 세계 곳곳에 대한민국의 과학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도 '국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만큼 세계를 향해 활짝 열린 문이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대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연구단지에 세계적 규모의 중성자 연구시설 하나로를 품고 있고 그리 멀지 않은 오창에 첨단 방사광가속기가 세워진다. 대전이 과학을 통해 우리나라 문화적 영향력의 본산이 되기를 기대한다. 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융복합양자과학연구소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세종 5-2생활권 첫 주택 공급 포문…'우미린 센터파크'
  2. 전신주 구리 접지선 훔쳐 한전에 2500만 원 손해 끼친 50대 검거
  3. 갈고닦은 기술의 향연
  4. 오석진 대표 교육복지 공약 '대전 에듀카드'본격 추진 재원마련은 과제
  5. 차주 없다고 압수한 블랙박스 '위법'… 반복되는 경찰 수사 절차 논란
  1. [대전MZ로그]"평범한 건 싫어요"···각양각색 소품을 나만의 취향대로 개성있게 꾸미는 2030 소비 트렌드
  2. [아침을 여는 명언 캘리] 2026년 6월26일 금요일
  3. [박헌오의 시조 풍경-21] 벌목장의 텃새
  4. "당연히 이길 줄 알았는데"…아쉬움으로 끝난 월드컵 응원
  5. 종사자 소진 예방과 안전한 근로환경 조성 위한 전문 심리상담 지원

헤드라인 뉴스


신고 30초 만에 경찰 등장… 보이스피싱 현행범 체포 성공

신고 30초 만에 경찰 등장… 보이스피싱 현행범 체포 성공

대전 동구의 한 약국 앞 길거리에서 시민과 경찰의 신속한 공조로 8천만 원 대의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이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대전동부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3월 19일 오후 6시경 대전 동구 소재 약국 앞 현금인출기 인근에서 40대 여성 피해자가 누군가와 통화하며 흰 가방을 20대 남성에게 건네고, 남성이 이를 받아 급히 자리를 떠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현장에 있던 50대 시민은 이를 수상하게 여겨 즉시 남성을 주시하며 112에 신고한 뒤 피의자의 뒤를 쫓았습니다. 신고를 받고 인근에서 거점 순찰 중이던 대전역지구대 송준호 경사와..

차주 없다고 압수한 블랙박스 `위법`… 반복되는 경찰 수사 절차 논란
차주 없다고 압수한 블랙박스 '위법'… 반복되는 경찰 수사 절차 논란

교통사고 현장에 남겨진 차량에서 경찰이 블랙박스 SD카드를 영장 없이 압수한 것은 위법수집증거에 해당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사고 차량이 현장에 남아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유류물 취급한 경찰의 절차 판단이 재판에서 부적절하다고 확인된 것이다. 과거 분실 휴대전화 마약 수사 사례처럼 경찰이 현장에서 확보한 증거가 위법수집증거로 배척되는 사례가 반복되면서, 현장 경찰의 증거 확보 역량과 적법절차 이해 부족이 여실히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25일 대전지법에 따르면 제3-1형사부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도주치상), 도로교통법 위반(..

KAIST "세계 최초 양방향 `브레인 로봇` 기술 개발 나서"
KAIST "세계 최초 양방향 '브레인 로봇' 기술 개발 나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연구진이 사람의 뇌 신호로 외골격 로봇을 실시간 제어하고, 로봇이 감지한 촉각·힘 정보를 다시 뇌에 전달하는 차세대 뇌-로봇 인터페이스 플랫폼 개발을 시작했다. 기계공학과 공경철·김정 교수 연구팀은 ㈜엔젤로보틱스와 함께 범부처 첨단 의료기기 연구개발사업 플래그십 과제로 세계 최초 양방향 'Brain-to-Robot' 시스템 개발에 착수했다고 25일 밝혔다. 이 과제는 4월부터 2032년 12월까지다. 뇌 신호로 커서를 움직이거나 스마트폰을 제어하는 뇌 인터페이스 기술은 이미 인체 임상 단계에 진입해 있다...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갈고닦은 기술의 향연 갈고닦은 기술의 향연

  • 대한민국 패배에 실망하는 축구팬…32강 진출 불투명 대한민국 패배에 실망하는 축구팬…32강 진출 불투명

  • 개원 준비로 분주한 대전시의회 개원 준비로 분주한 대전시의회

  • 여름 반기는 주황빛 능소화 여름 반기는 주황빛 능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