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사월의 역사와 재난 앞에 선 무대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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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사월의 역사와 재난 앞에 선 무대의 기억”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 승인 2023-04-10 10:26
  • 신문게재 2023-04-11 19면
  • 이유나 기자이유나 기자
조훈성님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난 지켜보았다. 언 땅이 녹으면서 꽃대에 노란 산수유부터 피었고, 이어 매화와 목련이 그 담엔 개나리, 진달래, 벚꽃엔딩. 흩날리는 낙화의 그 꽃비를 맞노라면 그렇게 만발하던 봄꽃들의 이어달리기에 그토록 눈부시게 환했던 미소가 어느새 저물어 눈가가 젖는다. 그렇게 꽃잎이 피고 졌다고 슬펐던 것일까, 아니면 4월이라서일까. 이제 예닐곱 딸아이의 손을 잡고 제주 4.3사건 희생자 추모곡 '애기 동백꽃의 노래'를 웅얼거리면 녀석이 가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콧노래로 따라 한다. "산에 산에 하얗게 눈이 내리면, 들판에 붉게 붉게 꽃이 핀다네- 님 마중 나갔던 계집아이가 타다 타다 붉은 꽃 되었다더라…"

지난주, 지역의 복합문화공간 '구석으로부터'에서 제주 4.3기념연극 '목마른 열두 신들'을 봤다. 대전에서 4.3연극을 한다는 게 낯선 일만은 아니다. 아신아트컴퍼니에서 지난 2020년 제작된 연극 '협상1948'도 제주4.3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연극들로 인해 고통스럽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 처절한 4·3의 역사가 단번에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 거행되는 '기억하기' 의례는 단지 어떤 비극적 사건이나 재난이 있었다는 '알려주기'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4.3사건과 우리가 사는 대전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맞닿아 있는지 이끌어 내는 게 역사적 공감을 더 할 수 있다. 무대형상화라는 이미지로 전달되는 역사가 파편화된 기억하기, 즉 비극적 연민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사자의 고통에 대한 비당사자의 상상적 접근이라는 표면적 서사에 그칠 수 있다. 고통을 당한 것과 고통을 상상하는 것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어 작품을 통해 역사에 공감한다는 것은 자칫 타인의 고통을 너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작품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연극의 '목격자'인 관객에게 역사 단절의 사이를 좁히며 바로 여기부터 함께 제주 4.3에 대해, 지역의 아픈 역사를 알아보자는 지시문이자 첫 단추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놀이패 한라산'을 중심으로 거의 매년 제주4.3 관련 마당극 작품이 꾸준히 올려지고 있다. 놀이패 한라산의 마당극 '4월굿-한라산'의 대사 한 토막을 담아본다.

마을 2 : 난, 이날 이때꼬지 땅 파 먹으멍 사는 거 박긔 모르는 무식한 늙은이우다. 공산주의가 무신 중이인지, 웬편이여 오른펜이여 허는 것이 뭣산디, 우리가 바라는 건, 엇이민 엇인대로 펜안허게 살아지민 좋은 시상 아니우꽈? 경헌디 해방이 되어 좋은 시상 왔덴 헌게 다 뭐우꽈? 나 고튼 늙은이, 젖도 안 뗀 물애기까지 빨갱이렌 허멍 죽이는 게 좋은 시상인지는 모르쿠다마는 (하략…)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자행된 그 역사적 비극으로 재현되는 집단 트라우마는 일반 관객의 보편적 정서에서 부담스러운 경험이기도 하다. 수난의 역사든, 재난의 현장이든 우리는 그것에 대한 기억방식에 대해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목마른 신들'을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 무참하게 죽어간 존재라 본다면, 이러한 연극은 바로 목마른 신들이 벌이는 인정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단 제주4.3사건 만이 아니다. 불과 얼마 전의 '이태원 참사'든, 곧 맞이할 4월 16일 '세월호 참사9주기'든 우리는 그 망각의 시간을 가로질러, 그 기억의 시간을 만들어 공동체적인 속죄와 애도, 화해를 가져갈 것이다. 기억투쟁과도 같은 무대의 재현은 늘 한 기념장소를 만들며 그 안에서 집단의 기억을 회상하고 역사적 진실에 대한 확산을 바란다. 해마다 반복되는 연극의 기억과 기념 사이에서 그 의례를 통해 공동체가 지향하고자 하는 가치를 소중하게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 2015년에 두산아트센터에서 봤던 크리에이티브 바키의 '비포 애프터'에서는 세월호 이전과 이후, 우리 삶과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저 타인의 고통뿐인지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연민'에서 빠져나와 타인의 고통을 체험하는, '당사자 만들기'였다. 우리는 그 고통을 끊임없이 감각하고 연결하면서 고통을 지는 사람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사월하고도 참, 박목월의 '4월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하자면, '돌아온 4월의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들고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씻을 수 없는 역사의 비극과 재난의 상처를 기억하고 그것이 반복되지 않길 새겨야 할 것이다.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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