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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호진 신탄진고 교사 |
여하튼 비록 졸업은 하지 않았지만, 수능이 끝나는 순간 종료지점에 도착한 달리기선수처럼 학생들은 기진맥진한 숨을 고르며 현실의 자각을 느낀다. 그간 막연하게만 느껴왔던 사회에 송두리째 내동댕이쳐지는 기분. 이제는 공부를 더 하려면 돈을 내야 하고, 주변의 시선을 감내해야 하고, 20살이란 청춘의 시간을 헌납해야 한다. 그리고 학교의 실세는 더이상 고3이 아니다. 이제 바로 밑 고2가 고3의 위치를 갈음하게 된다.
그래도 학사 일정상 등교일수를 채워야 하기에 마음이 휑해 버린 고3들은 학교에 온다. 선생님들은 그런 고3의 공허함을 잘 알기에 그들의 사소한 일탈도 합법의 한에서는 눈감아주려 한다. 그래서 수능 끝난 고3 교실에는 평소 학교에서는 상상 못 했던 일들이 펼쳐지곤 한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만화책 전집을 캐리어에 가득 채워 오는 학생도 있고, 교실 TV에서는 못 봤던 영화나 드라마가 하루종일 상영된다. 그간 어머니의 등짝 스매싱에 하지 못했던 게임을 노트북을 들고 와 친구들과 눈이 빠지게 하는 것은 기본이오, 엑스박스나 플레이스테이션 등 게임기를 통째로 설치해 본격적인 게임라이프를 즐기기도 한다. 물론 절대다수는 휴대폰을 붙잡고 있다. 그놈의 휴대폰.
지금까지 봤던 가장 인상 깊었던 학생은, 수능이 끝난 후 대학교 등록금을 벌기 위해 새벽까지 택배 상하차 작업을 한 후 원터치 텐트를 가져와 교실에서 꿀잠을 청하던 학생이다. 20대의 사회초년생들이 세상에서 겪을 서러움에 연민이 들며, 차라리 기특했다.
학생들은 자연스레 내게 묻는다.
"쌤, 차라리 이럴 거면 학교 안 오는 게 낫지 않나요?"
물론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 학사 공백을 굳이 메꾸려 애꿎은 학생들 학교로 불러오게 해 폰이나 잡고 있게 하지 말고, 학생들이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여행 등을 다닐 수 있는 시간으로 주는 게 어떨까- 하는 취지에 걸맞은 현장체험학습 제도가 생겨났지만, 몇 년 전, 현장체험학습 제도를 활용해 강릉으로 여행을 떠난 고3 학생 10명이, 펜션의 보일러 설비 불량으로 일어난 화재로 3명이 숨지는 참사가 일어났다. 그 이후로 현장체험제도가 다시 빡세져, 이마저 자유롭게 쓰기가 어렵게 됐다.
다시 교실은 폰과 게임과, 만화의 도가니탕이 됐다. 물론 그동안 억눌린 취미를 마음껏 즐기는 것도 좋았지만, 스마트폰 화면 속이 아닌 화면 밖에도 재밌는 게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때였다, 어제부터 내린 함박눈에 운동장 가득 새하얀 눈이 쌓인 걸 볼 수 있었다. 마침 아이들도 다들 계속된 교실에서만의 생활로 잔뜩 지루했던 참이었다.
"나가자!" 한마디에 다같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운동장으로 나섰다. 원터치 텐트 안에서 잠을 청하던 아이도, 라꾸라꾸 침대에서 껴안고 자던 친구들도 다같이 나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 담임교사에게 감정이 있던 친구들이 꽤 있었는지 난 그야말로 눈 속에 파묻히다시피 했다.
그러고도 뭔가 아쉬웠다. 겨울왕국에서 착안한 '엘사, 나와 눈사람 만들래?'라는 노래를 부르며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남학생 40명이 눈을 굴리니 그야말로 2m가 넘는 눈사람이 완성됐다. 워낙 크기에 타이어로 목도리를 두르고, 쓰레기통으로 모자를 씌웠으며, 빗자루로 양팔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학생들과 함께 중앙현관 계단에 눈을 퍼 담아 눈썰매장도 개장했다. 뒷감당은 생각 못 한 채, 수능 결과에 대한 걱정은 버리고 다 같이 동심으로 돌아가 눈썰매를 탔다. 물론 즐겁게 타고, 다시 얼어붙기 전에 눈을 제거하는 수고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오랜만에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짜릿했던 하루였다.
그리고 그다음 날, 혼자 있던 눈사람이 외로워 보였든지, 그 옆에 한 고등학생이 그 눈사람의 애인을 만들어주었고.
그다음 날, 커플인 게 부러웠던지, 밤사이 누군가 눈사람 커플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참 알 수 없는 고등학생들의 마음이다. 류호진 신탄진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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