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의 취재 기록-22]90년대 서울 중심가의 두 얼굴…사치스런 유흥문화에서 꽃 피운 ‘국악의 전문화'

[10년간의 취재 기록-22]90년대 서울 중심가의 두 얼굴…사치스런 유흥문화에서 꽃 피운 ‘국악의 전문화'

우실하 학자, 오렌지 족 판치던 시절 전통찻집 열어 국악무대 만든 주인공
현재 국악계 이끌고 있는 명인·명창, 찻집 국악무대서 공연…‘국악인 등용문'
제1회 공연 출연자 왕기석 명창, “우실하 선생, 국악인보다 더 국악인"

  • 승인 2021-09-27 15:12
  • 수정 2021-09-29 15:06
  • 손도언 기자손도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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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실하(60·禹實夏)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교수가 1989년 8월부터 2001년 11월까지 서울 중심가에서 '가온누리' 전통찻집을 열었다. 우 교수는 10여년 동안 찻집에서 모두 265회가량 '가온누리 국악마당'을 열었다. 국악 무대에 선 국악인들은 현재 우리나라 국악계를 이끌어가고 있다.<우실하 교수 제공>
부자들 부모 밑에서 태어나 해외 명품 가방 등으로 치장하고 사치 등을 즐겼던 오렌지족과 고가의 외제차로 길거리에서 '야~ 차에 타'로 여성들을 유혹했던 야타족까지. 이들은 한때 서울 중심가에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소비생활 등을 즐겼던 젊은 세대였다. 이렇게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서울 중심가는 그들만의 세상으로 물들어갔다. 그야말로 서울 중심가는 남녀의 유혹, 술과 유흥, 사치와 과소비 등 시끄러운 밤 문화였다.

그러나 그 중심 한 켠에선 우리나라 '전통 음악'이 대중들과 호흡하고 있었다. 당시 서울 중심가의 사치스러운 유흥문화 속에서 '국악의 현대화·대중화·전문화'가 조금씩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 중심가의 두 얼굴이자, 20대 젊은이들의 상반된 생활이다.



31살 젊은 남성은 1989년 한 여름, 서울 중심가인 연세대학교 앞에서 전통찻집을 열었다. 바로 '가온누리' 전통찻집이다. 지하에 위치한 이 찻집은 45평(148㎡) 크기다. 당시 서울 중심가의 화려한 풍경을 감안하면 매우 정적이고, 차분한 찻집이다. 찻집 한 켠에선 작은 무대가 마련됐다. 북과 꽹과리, 장구 등 국악기가 무대에 놓여져 있었고, 무대는 찻집을 멋스럽게 했다. 차를 마시러 온 일부 손님들은 찻집 무대에 올라 국악기를 만져보고, 두드려보기도 했다. 평범하게 운영됐던 찻집은 어느 순간 명소가 됐다. 또 찻집 안의 작은 무대는 전국 최고의 큰 무대로 변했다. 당시, 국악인들 사이에서는 '이 무대에 오르지 못하면 명인·명창이 될 수 없다'는 말까지 있었다. 이 찻집 무대가 국악인들의 등용문 (登龍門)과 같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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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들이 1999년 8월 서울 가온누리 찻집에서 연주하고 있다. <우실하 교수 제공>
찻집 운영자이자, 당시 31살 젊은 남성은 우실하(60·禹實夏·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교수) 동양 사회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다.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학·석·박사를 끝낸 우 교수는 문화이론과 한국문화론 등 우리나라 전통음악에 큰 관심을 가졌다. 우 교수는 "처음에는 우리의 전통차 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찻집을 열었다"며 "국악에 관심이 있어서 다양한 국악 음악을 들려주는 게 찻집의 기본 운영 방침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개업, 2개월 후 대 반전이 일어났다.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국악 단체인 국립극장 국립창극단 소속 왕기석·김학용 명창이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단순하게 차 한잔 마시러 온 두 명창은 찻집에 반했다. 왕 명창은 당시 "저 무대에 누가 공연을 합니까"라고 물었고, 우 교수는 "공연까지 생각은 있지만, 아직 엄두를 못 내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어 왕 명창과 김 명창은 "우리가 다음에 공연을 해도 좋습니까"라고 물었고, 우 교수는 "언제든지 환영한다"고 답했다. 작지만 큰 무대의 시작이다.

그리고 1989년 10월 4일 오후 6시 국립창극단의 왕 명창과 김 명창이 이 찻집 '가온누리 국악마당'의 첫 무대를 열었다. 그들의 첫 무대는 제1회 무대다. 두 명의 명창은 1회 공연 때, 단가 사철가와 판소리 심청가·흥보가 중 눈 대목을 불렀다.

왕기석(가온누리 제1회 무대)국립민속국악원 원장은 "30여년 전, 김학용 명창과 차를 마시러 갔다가 찻집 분위기가 좋아서 판소리 심청가의 한 대목을 했다"며 "수백 회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1회 공연자여서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실하) 선생님 때문에 옛 기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감회가 새롭다"며 "그는 국악 전공자는 아니지만, 국악 전공자보다 더 국악을 사랑했던 분으로 기억한다"고 덧붙였다.

첫 무대 이후, 왕 명창과 김 명창은 2차례 더 공연을 이어갔다. 두 명창은 1~3회까지 대중들과 판소리로 소통했다.

두 명창의 판소리 공연은 국악계로 순식간에 퍼졌다. 우 교수는 두 달에 한번 열던 공연을 한 달에 한번으로 확대했다. 무대는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공연은 한 달에 한번에서 월 2회로, 나중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정기적으로 공연을 펼쳤다. '가온누리 국악마당'이라는 정식 명칭으로 말이다. 이 무대를 거쳐 간 명인·명창도 상당수다. 현재 국악계에서 내로라 하는 명인·명창들이 젊은 시절, 이 무대에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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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놀이 팀이 1999년 서울 가온누리 찻집에서 연주하고 있다.<우실하 교수 제공>
실제 국립창극단 단원(왕기석, 김학용)으로 시작된 가온누리 국악마당 무대는 당시 성우향 판소리 명창의 제자인 배일동·조동언·남해웅 씨뿐만 아니라 중앙대·이화여대·추계예대·서울예전·한양대·서울대·단국대 등 한국음악과 학생들이 무대를 이어갔다. 당시 무대에 섰던 소리꾼들은 현재 명창과 대학교수로 활동하는 등 우리나라 국악계를 이끌어가고 있다.

우 교수는 공연자들의 기록을 모두 남겼다. 누가, 언제, 어떤 곡으로 연주를 했는지 등을 카세트 테이프로 녹음을 해 놨다. 기록은 1989년 초기 몇 해를 제외하고는 1999년 8월 13일까지 모두 265회나 된다. 우 교수는 2000년 2월 중국 심양시 요녕대학교 한국학과 교수로 떠나기 전까지 기록이다.

우 교수는 "가온누리 국악마당에서 공연한 명인명창들의 기록과 음성 녹음 등을 모두 남겨놨다"며 "현재 우리나라 국악계를 이끌고 있는 그들이지만, 젊었을 때 음성(공연내용)을 공개하면 감회가 새로울 것"이라고 크게 웃었다. 그는 또 "당시 오렌지족 등 어수선한 서울 중심부에서 우리 전통음악의 맥을 이어 온 그들에게 진심으로 존경스럽다"고 강조했다.
제천=손도언 기자 k-55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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